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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15:21 (금)
비 오는 수요일 아침 '단골손님'
비 오는 수요일 아침 '단골손님'
  • 장인성 원장(경기도 용인시·참가정의원)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9.07.3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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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월 31일) 아침, 어느 단체 카톡방에 오른 글 한 편을 소개한다.

환자와 의사의 정서적 교감이 오롯하게 담긴, 그러면서도 '동네 의사'가 진료 현장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고민이 뚝뚝 묻어나는 글이다.

본지에 자신의 글이 소개되는 것을 글쓴이는 원치 않았음에도 소개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의사가 아닌 일반 독자에게, 대한민국 의사들의 따듯함과, 그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장인성 원장이다. 경기도 용인시 상갈동 '참가정의원'에서 진료하고 있다. 최대집 집행부에서 초대 재무이사를 거쳐, 지금은 재무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 주>

[사진=pixabay]
[사진=pixabay]

고령인 환자 분들이 몇 달 안보이시면 가슴이 철렁거린다. 세상을 뜨시면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 오는 수요일(7월 31일) 아침, 첫 환자 분은 80대 여자 어르신이었다. 12년 째 우리 병원을 찾으시는데, 오랜 만에 오셨다. 반가웠다. 

이 분이 진료실에 들어오시면 항상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오실 땐 단골손님, 안 오실 땐 남인데…."

가수 고 조미미 씨의 '단골손님'이라는 노래다. 자신이 나에게 그런 존재라는 뜻인가 보다. 

환자 분들 중 좋은 입담으로, 재밌는 말씀을 던져주시는 어르신들도 계시는데, 할머니도 그런 분 중 하나이시다. 이런 어르신들에게는 장단 맞추느라 나도 같이 '편한 말'을 쓴다. 친근감이 배가 되니까... 무엇보다 내 엄마 아버지 같으니까...

한데, 할머니 입에 걸리면, 돌아가신 분도 가차 없이 '도마 위'에 올라 낱낱이 해부된다. 이 분의 '주 재료'는 할아버지이다. 늘 자신의 병의 원인을 할아버지에게 돌린다. 할머니가 병원을 찾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단 한가지이다. 

"영감이 술만 마시면 자꾸 올라타서 죽겠어. (거기가) 자꾸 헤어져서 아파. 연고 하나 줘 봐. 그런데... '못 올라타게' 하는 약은 없어?"

"어머나, 좋으시겠다, 할머니는…정말로 복 많이 받으신 거야. 그냥 가만히 계셔. 한데, 할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셨잖아!"

"영감이 꿈에도 온다니까! 그 귀신한테 평생을 못 벗어나네. 이젠 죽어서도 나한테 올라타네…그런데, 하긴 뭐 나도 싫지만은 않아. 그 인간이 원체 나 밖에 몰라…"

할머니가 병원에 처음으로 오셔서 '연고'를 찾으셨을 때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잠지 약 좀 줘 봐!"

"예? 잠지 약요?"

"영감이 자꾸 술만 마시면 올라타서 죽겠어. 자꾸 잠지가 헤어져서…"(당시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할머니는 이렇게, 자신의 병을 자신이 진단하고 처방한다. 그는 '의사'이다. 다만 그가 의사로서 못하는 것은 단 하나, 처방전을 쓸 수 없다는 것뿐이다.

[사진=pixabay]
[사진=pixabay]

오늘도 그러셨다.

'단골손님'을 흥얼거리시며 의자에 앉자마자 "연고 두 통!"이라고 말씀하셨다. 긴 말이 필요 없는 분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레파토리'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 산부인과 가야 해. 산부인과 가서, 정식으로 진료를 받으셔."

"잔 말 말고, 연고 처방이나 해 줘."

"아! 할머니, 징하다, 징해!"

내 진료 결과가 본인 생각과 다르면, 나는 바로 돌팔이가 돼 버린다. 

간곡하게 산부인과 행을 여러 차례 권했고, 지금도 권하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거부하신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앞으로도 물을 생각이 없다. '내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답변이 나오겠는가? 

이럴 땐, 내가 여성 산부인과 전문의가 아닌 게 약간은 원망스럽다. 조금이라도 내가 더 도움이 된다면 좋겠는데….

처방을 마치려는데, 할머니가 한 마디 더 하신다. 

"아참 온 김에 염색약도 하나 처방해 줘!"

"참 너무하시네. 병원이 무슨 슈퍼야? 비누, 화장품, 샴푸도 처방해 달라 하시지 그래?"

"그래? 그런 건 보험 안 돼? (깔깔깔.) 난 다 되는 줄 알았지!"

할머니는 너무도 귀엽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분이시다.

비 오는 수요일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2018년 7월 25일 열린 대한의사협회 제13차 상임이사회에 앞서 장인성 전 재무이사(오른쪽)가 최대집 회장에게 투쟁기금 1000만 원을 기증하고 있다. 장인성 재무이사는
2018년 7월 25일 열린 대한의사협회 제13차 상임이사회에 앞서 장인성 전 재무이사(오른쪽)가 최대집 회장에게 투쟁기금 1000만 원을 기증하고 있다. 장인성 재무이사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의사들의 억울하고 부당한 문제들이 끊이지 않고 있고, 목청을 높일 일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면서 "의협 재무이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늘 자금이 부족한 현실이 아쉽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한다"며 투쟁기금을 기탁한 배경을 설명했다. ⓒ의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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