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청진기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 데스크 desk@doctorsnews.co.kr
  • 승인 2019.01.0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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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솔 전공의(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 1년)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을 유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무어라 시작할까 첫 문장을 써나가기 어려워 한동안 깜박이는 커서만 마주 보고 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고 임세원 교수님의 비보에 모든 의료인이 마음으로 함께 울고 있을 것이다. 갑작스런 이별에 신음하고 있는 와중에도 오히려 고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의 안전을 보장하길 바라고,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를 바란다는 유가족의 호소에 또 한 번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을 내려친다.

몸과 마음 아픈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부단히 애쓰던 그곳에서 훌륭한 선배이자 내 동료가 환자의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 '사막을 건너는 데 필요한 건 한 병의 물이 아닌 한 줌의 희망'이라고 이야기했던 교수님의 글귀가 좀처럼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수많은 마음 아픈 환자들을 마주하며 겪는 고통을 저서를 통해 드러내면서까지 교수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환자들의 편에 서고 싶어 하셨다는 언급에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 생전에 만나보지도 못한 동료의 죽음에 뼈저리는 슬픔을 느끼면서도, 언제나 그랬듯 각자의 위치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어김없이 환자를 돌보는 동료들이 이렇게 나약하게 느껴진 적도 없다. 우리에겐 어쩌면 한 줌의 희망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한없이 엄습해온다.

정신과 환자는 '폭력적'이라는 막연한 낙인을 찍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언론의 행태 때문일까,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기에 앞서 '사실은 평소에 의사들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는 말처럼 폭력을 합리화하려는 의사들을 향한 대중들의 차가운 편견 때문일까, 아니면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의 강화만을 외치며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예방책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나오지 않는 나 자신의 답답함 때문일까. 좀처럼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

이 사건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의료인이 당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안전한 진료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의료인 모두의 간절한 바람은 이미 예전부터 지속해왔다. 응급실은 당연하고 진료실 내에서 의료인들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함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진료 현장에서 의료인을 향한 폭력이 근절되도록 의료계는 끊임없이 정부와 시민사회에 요구했지만 우리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바뀐 것은 없었고 아쉽게도 우리는 그들의 차가운 외면에 또 순응하기 바빴다. '다음으로 맞을 사람이, 칼에 찔릴 사람이 나는 아니겠지'라는 안일함으로 그렇게 바보처럼 버텨왔다. 우리 스스로의 큰 잘못이다.

상당수의 의료진 폭행이 응급실에서 이뤄진다는 이유로 의료기관 내 폭행에 대한 대책은 '응급실 내'로 한정 짓기에 급급하다. 이제야 진료실 내의 의료인의 안전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왜 누군가가 다치고 목숨을 잃어야만,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어야만 바뀌는 것일까. 왜 우리는 아까운 소를 잃고도 외양간 하나도 제대로 고치지 못했던 것일까.

입법·행정·사법부와 의료계는 시간과 재원을 아끼지 말고 함께 머리를 맞대어 열악한 진료 현장에서 선량한 의료진이 더 이상 억울하게 희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정으로 환자들이 인격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도록 치열하게 논의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위협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를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달라. 단순히 가해자를 향한 형벌의 강화로 이러한 문제는 절대 막을 수 없다. 사회 전반적인 인식개선과 의료정책 수준에서의 예방적 관점으로 시각을 돌려야 할 때이다. 그것이 교수님이 우리 사회에 남겨주고 가신 마지막 시대적 과제이다.

폭행을 방지하기 위한 보안 인력의 증원 및 배치, 흉기를 반입할 수 없도록 의료기관 내 금속 탐지기 설치, 인식개선을 위한 대국민 캠페인, 방송 매체에서 보이는 의료인 폭행 장면 금지, 정신건강 복지법의 개정을 통한 급성기 혹은 위험 가능성 환자의 적극적 관리, 진료 환경안전 가이드라인 마련 등등…. 안전한 의료환경을 위해 그 무엇이든 당당하게 요구하자. 우리 동료의 희생을, 그로 인해 위협받는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저 넋 놓고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사회 성원 각자의 아픔이 서로를 해하여 또 다른 아픔이 되는 것은 더 이상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족한 자를 불러주시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필진 요청에 응했다. 이런 좋은 기회를 통해 나 역시 진료 현장에서 겪는 훈훈한 이야기들로 몸과 마음이 지친 전국 13만 의사 동료들에게 몇 줄 안되는 글을 통해 작은 웃음을 전하고 싶었다. 오늘보다 밝을 의료계의 내일을 기대하며 한 줌 희망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 감당 못 할 아픔을 직면한 지금 상태로는 그런 글을 쓸 자신이 도저히 없다.
그저 이런 나약한 글을 쓸 수밖에 없음에 한없이 가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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