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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06:00 (금)
청진기 의사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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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2.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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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글을 과연 잘 쓸까?
어릴 때 공부를 잘한 애들은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 공부를 잘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랬다.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일기도 썼을 것이고, 담임선생님 추천으로 글짓기 대회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의과대학 다닐 때에도 딱딱한 원서도 읽고 가끔은 베스트셀러도 읽었을 게다. 그래서 의과대학생들도 대부분 글을 잘 쓴다.

의과대학.의전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의사수필가협회가 주관한 8년 동안의 수필공모전 결과를 보면, 응모작 전체 수준이 높고 일부는 거의 전문가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는 1차 심사를 맡은 의사수필가협회 회원들뿐 아니라 최종 심사를 맡은 전문가의 평이니 믿을만하다. 나도 1차 심사를 하면서 뛰어난 글 솜씨를 보인 글을 보며 놀라기도 했지만 내 자신이 초라해지기도 했다.

의사들은 서류 작성이 많기에 대체로 글을 잘 쓴다. 의사들의 진료의뢰서나 소견서 진단서 등을 볼 때면 여러 번 읽을 때가 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목적이 정확히 드러난 훌륭한 글을 접할 때다. 더구나 그 내용이 환자를 위한 마음이 촘촘하게 드러나면 잔잔한 감동마저 인다. 

종합병원에서 근무했을 때 전임자의 차트를 볼 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기록이 잘된 차트를 보고 있으면 환자 상태를 곧바로 파악되고 치료 플랜이 바로 서게 된다. 공짜로 무언가를 얻은 것 같다. 

의사들의 업무와 관련된 글은 글 솜씨가 아니라 교육이고 훈련이고 의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그런 기록에도 행간의 뜻이 숨어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진단서를 읽으면 누구를 위해 쓴 내용인지 알 때가 있고 또 진료의뢰서를 보면 귀찮은 환자를 떠넘기는 것인지, 자신보다 더 잘 치료할 곳으로 부탁하며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있다. 그게 드러내지 않고 마음을 드러내는 솜씨 좋은 글이다. 

글을 잘 쓰려면 삼다(三多)라는데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면 된다고 했다. 의사들은 책을 많이 읽었고 기록을 계속 남기고 그 기록에는 본인의 뜻이나 감정이 실린 경우도 더러 있으니 생각도 많이 했다고 볼 수 있다. 글을 잘 쓸 토양은 충분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도 문학가가 되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그런 업무적인 글과 문학적인 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사들의 글은 대상도 한정돼 있고 목적도 다르다. 글의 성격상 건조해서 감동을 주거나 선동을 하거나 여론을 조장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차이는 아니다. 단지 독자의 대상만 다르기에 초기에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그 뻔뻔함이 없어서 소설가 시인 수필가 등이 되지 않는지 모른다. 글의 성격과 목적과 대상이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시도하면 될 일이다.

'12월 7일 결혼을 전제로 당신과 선을 봤습니다.
어떡하죠? 나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습니다.
부드러운 인상에 서글서글한 눈매 미소 띤 얼굴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치아와 찻잔을 잡은 하얀 손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분비되어 구름 속을 떠다닌 것 같고
다시 만날 날을 떠올리며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으로 몸과 마음이 다 타들어가기 전에
당신께 고백하오니 부디 고진 선처 바랍니다.'

진료의뢰서 식의 고백으로 장난삼아 써본 글이다. 특별하기야 하겠지만 글의 성격이 어울리지 않는다. 고백을 받아줄 여인의 마음으로 들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면 다른 글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한미수필문학공모전 1회에 응모했다.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꼭 써보고 싶은 소재가 있었던 것 같다. 참으로 오랜만에 쓴 글이었다. 운 좋게 장려상을 받았다. 글 써서 받은 것은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엄청 좋았다. 2회에도 참여했다. 좋은 소재가 있었다. 또 장려상을 받았다. 그런데 기분이 별로였다. 그 사이에 내가 건방져 진 것이다. 3회에 출품했다. 탈락했다. 4회에도 탈락했다. 

그 후로는 출품 안했다. 그즈음 보령수필문학상이 새로 생겼다. 두 번 출품했고 모두 낙방했다. 본격적으로 수필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수필가로 등단한 선배님의 지도를 받았고 선배님이 인도한대로 퇴고를 거쳐 2006년에 수필가로 등단했다. 등단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글 솜씨가 늘지도 않고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다.  글을 써보고 싶은 경우는 거의 없고 잘 쓸 자신도 없었다. 

다만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글을 썼다. 그래도 다 써놓고 나면 잘 쓰지는 못해도 대견하기도 하고 큰 숙제를 마친 후에 오는 후련함 만족감이 있는 것은 좋았다. 

요즘은 수필 쓸 때 내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게 갈수록 부담이 된다. 그리고 또 숨기고 싶어도 드러나기에 너무 조심스럽다. 잘난 체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망가지듯 내 치부를 계속 드러낼 수도 없다. 이래저래 독자를 의식하면 글이 쉬이 써지지 않는다. 쓰고 나서 그나마 내가 만족하면 다행이고 독자가 공감하면 감사할 뿐이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이라는 수필의 일부를 인용한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설흔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香臭)와 여운(餘韻)이 숨어 있는 것이다' 
- 피천득, '수필' 중에서 - 

좋은 글은 좋은 사람처럼 왜 좋은지 모른다. 그저 기분이 좋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띄어지고 자주 보아도 질리지 않으면 된다. 위로가 되고 힘이 생기면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제 1년 동안 의협신문 청진기 칼럼을 마치게 되었다. 그동안 잘난 척한 게 드러났을 수도 있고 부끄러운 고백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 비난 받을 수도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별일이야 있겠는가! 이런 뻔뻔함이 필요하다. 그래야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독자여러분께 감사인사 드린다.

 

1년 동안 [의협신문] 칼럼 '청진기'를 빛내주신 ▲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김재헌 순천향의대 교수(순천향대 서울병원 비뇨기과)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바로 [의협신문]의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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