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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약가' 언제까지나 감내할 순 없다"
"'비밀 약가' 언제까지나 감내할 순 없다"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8.12.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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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제약사 신약 등재 전략…국가 간 협력·법제도 개선 서둘러야
박실비아 연구위원 '약가 불투명성' 비판…"재정·지불능력 기준으로"
박실비아 보사연 연구위원
박실비아 보사연 연구위원

"약가 수준에 대한 판단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외국 가격과의 비교가 아니라 분명한 값이 있는 국내 보건의료 재정과 지불 능력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박실비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보건복지포럼> 최근호에 '의약품 접근성과 약가 투명성: 트레이드오프인가?' 기고를 통해 약가 결정에서 외국 등재 약가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국내 약가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의 정교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고가 신약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신약 급여와 약가 결정 과정에서 실제 가격을 비밀에 부치기로 합의하면서 공식 등재 가격을 높게 유지하는 계약이 늘고 있다. 이젠 등재약가가 실제 지불가격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약가의 불투명화는 다시 약가 결정의 어려움, 의약품 접근성 차별, 정책 지속성 위협 등의 악순환을 초래하고 있다.

단일 공공보험으로 약가 파악에 문제가 없던 우리나라 역시 2014년부터 대체 치료제가 없는 고가의 중증 항암제와 희귀질환 치료제에 대해 위험분담제도가 시행되면서 등재 가격과 실제 지불 가격이 일치하지 않는 불투명성이 나타났다. 위험분담제도는 대체 치료제가 없고 비용효과성이 낮은 고가 치료제에 대한 환자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실제 지불 가격보다 등재가격을 높게 설정하고 실제가격은 비밀로 유지하는 예외적인 제도다.

문제는 이렇게 왜곡된 약가가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참조기준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다국적 제약사 전략에 고비용 신음…모두가 패자되는 시스템

박 연구위원은 의약품 가격 불투명성이 초래하는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약가 결정의 어려움 ▲의약품 접근성 문제 ▲정책 운영과 지속성 위협 등을 제시했다.

먼저 약가 협상 과정에서 지불자와 제약사간 정보불균형으로 인해 적정한 가격을 산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공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외국 가격은 실제 가격보다 높고, 실제 가격 정보는 제약사만 소유해 자국과 경제 수준이 비슷한 다른 국가에서 어느 정도로 지불하고 있는지, 합의한 약가가 적절한 수준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개별국가를 상대로 약가 협상을 벌이는 다국적 제약사가 '약가 비밀화'를 견지하는 현실에서는 경제성 평가 등 신약의 가치평가에 따라 적정약가를 산출해 지불자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를 늘리고, 인구 수 등 시장규모에 따른 구매력을 통해 협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의약품 접근성 역시 높아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지불 약가를 등재 가격보다 낮추면서 비밀로 하는 것이 약을 급여하고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제약사들이 신약을 출시할 때 시장 규모가 큰 고소득 국가에 먼저 제품을 공급해 높은 약가로 국제참조가격을 형성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결국 높게 매겨진 가격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와 협상하면서 경제수준이 낮은 국가에는 상대적으로 늦게 제품을 공급하거나 아예 공급하지 않으면서 접근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은 명분을 잃고 있다.

약가 비밀화가 초래하는 행정비용 증가도 큰 부담이다.

등재 약가와 지불가격이 다른 약에 대해 환급 등을 통한 비용회수 작업을 수행해야 하고, 환자 본인부담금이 약가에 연동돼 있는 경우 환자가 등재 약가에 기반해 지불한 본인부담금 정산작업도 필요하다. '약가 비밀화'를 계약함으로써 비밀 유지에 대한 행정부담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무엇보다 외국 약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협상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축소되고 결국 약가결정에 관한 행정비용 증가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국제참조가격제의 지속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약가의 불투명성은 의약품의 현재와 미래 자원 배분 계획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현재 의약품에 얼마나 지불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약의 임상적 가치를 기준으로 지불 수준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어떤 신약개발이 필요한지에 대한 안목을 갖기 어려워진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이런 약가의 비밀화는 제약사에는 도움이 될까.

제약사가 지불 약가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자사 약에서는 최대한 수익을 추구할 수 있겠지만 경쟁사의 약가는 알 수 없으므로 역시 정보의 불균형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단기적으로는 약가 비밀화를 통해 접근성과 재정위험 관리 모두를 추구한다고 생각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지불자와 제약사 모두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유럽 중심 공동 대응 전략 타산지석…국제 연대 확대 바람직

그렇다면 국제 사회는 약가 불투명성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박 연구위원은 "현재 국제사회는 단순히 약가 자체의 투명화뿐만 아니라 의약품의 개발 비용을 포함해 약가가 어떻게 결정됐는가에 대한 정보공개도 요구하고 있다"며 "세계적으로 국가 간 협력 강화와 국가 내에서의 약가 투명화를 근간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2015년 이후 의약품 정보 공유, 공동 약가 협상, 공동 구매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협력체인 '베네룩스에이'는 2015년 4월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희귀의약품 약가협상을 공동으로 수행했으며, 2016년 오스트리아가 합류하면서 규모가 확대됐다. '베네룩스에이'에서는 의료기술 평가, 기술 조기 검토, 의약품시장, 가격, 질병등록기관 등에 대한 정보 공유, 약가 공동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국가 내 움직임도 두드러지고 있다.

캐나다는 내년부터 모든 제약사는 비밀 약가라 하더라도 각 지역과 기관에 제공한 약가 할인 내역을 연방정부 신약약가검토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미국은 '공정약가법'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제약사는 12개월 동안 약가를 10% 이상 인상하고자 할 때는 보건부에 사전 고지하고 약가 인상을 정당화하는 자료(제조 및 연구·개발비요, 수익, 광고 및 마케팅 비용)를 제출해야 한다. 입법화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30개 주에서 약가투명화 관련 법률이 제안됐고 현재 6개주에서 법안이 통과돼 시행을 앞두고 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약가 투명화를 위한 잰걸음에 나섰다. 독일은 지난해 건강보험 약품비 관리를 위한 '의약품 공급 강화법'을 도입하면서 약가 비밀화를 폐기했다.

그러나 일부 국가의 대응과는 달리 앞으로도 신약 등재가격이 높아지고 비밀 약가가 형성될 환경은 계속될 전망이다.

박 연구위원은 "가장 중요한 것은 지불자가 의약품의 보장성과 약가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몇가지 정책적 전략을 소개했다.

먼저 지불자, 구매자들의 공동 대응과 협력을 제안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정책적 자원이 빈약한 국가들이 약가의 세계적 불투명화에 소외되지 않도록 보다 넓은 차원의 국제적 연대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내적으로 외국 약가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정비하고, 위험분담계약이 활발하게 이뤄지거나 국가 단위 공시가격과 별도로 지역단위에서 약가협상이 이뤄지는 국가의 약가는 불투명성이 높으므로 국제참조가격 목록에서 해당 국가를 제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국 약가를 참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약가 수준은 제도 역량과 구매력, 협상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전제한 박 연구위원은 "보험자는 재정 계획에 따라 지불 의향에 부합하는 가격 수준을 산출해 제시해야 하고 약가 수준에 대한 판단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외국 가격과의 비교가 아니라 분명한 값이 있는 국내 보건의료 재정과 지불 능력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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