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2:28 (금)
청진기 걷는다는 것
청진기 걷는다는 것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8.10.08 11:29
  • 댓글 0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의협신문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본과 2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올 여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게 무더운 7월이었다. 무언가 나를 위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건강한 몸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만든 계획은 매일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매일 저녁 집에서 조금 걸어가야 하는 큰 운동장이 있는 캠퍼스에서 매일 한 시간 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땀이 흠뻑 젖을 때까지 달리고 나면 기분이 좀 후련해졌다. 하지만 오랜만에 해보는 운동 탓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꾸 무리를 하게 됐다. 문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거리와 그 때 소모될 체력은 미리 계산해두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달려버리는 것이었다. 헉헉, 오늘도 그만 너무 달려버렸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도 빨리 집에 가려는 마음에,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데, 길에는 차가 많이 밀려 정체돼 있었고,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는 마음에 그 길을 건너려 했다. 

난생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달려오는 차에 부딪힌 것은 아니었다. 밀려 있는 차 사이를 쑥 빠져서 지나가려 머리를 쓴 게 잘못이었다. 갑자기 출발하려는 택시가 앞으로 나오면서 범퍼 사이에 다리를 끼고 말았다. 놀란 택시아저씨의 고함 소리에 그만 나도 놀라서 급히 다리를 빼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저녁 때부터 무릎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는 점점 더 부어서 걸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병원에서 촬영한 사진에는 다행히 뼈가 부러져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결국 목발을 집어야 했고, 2학기를 그렇게 시작했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중에 퇴행성 관절염으로 고생할 거라고 놀려댔다. 몇 주가 지나서는 저절로 통증은 줄어 들었고, 예전의 깡총거리며 급히 다니는 걸음을 되찾게 됐다. 그것으로 그만인 줄 알았다.

최근에 다시 무릎의 통증을 느끼게 되기 전까지는. 지난 주에 갑자기 무릎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주말에 집에서 물건을 좀 나르고 일을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보다. 이러다 말겠지. 하지만 무릎은 점점 더 부어올랐다. 예전의 그 무릎 통증이었다. 이런. 다음 날에는 아파서 걸을 수가 없게 됐다. 급한대로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무릎에 보조기를 사서 착용했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라고 평소에 우습게 여겼던 보조기는 의외로 통증을 줄여줬고, 걷게 도와줬다.

이러다 평생 절뚝거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고, 걷는 게 힘들어지니, 공간의 거리가 달라 보였다. 금새 갈 수 있었던 병원 건물 이 편에서 저 편은 거의 천국에서 지옥까지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내일은 좋아질 거라는 희망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걷는다는 것. 
그걸 잃어 버린 것이었다.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조각을 보면 금세라도  부서질 것처럼 앙상한 사람이 큰 보폭으로 걸어간다. 멈출 수 없는 실존이 당당히 아니 그냥 걷는 것이다. 마지막 인간의 위엄을 갖추고 싶은 환자들의 소원은 의외로 화장실에 혼자 걸어 다녀 오는 것이다. 남의 도움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 올 수만 있는 요령을 함께 찾아보는 것이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서술일까?

재활은 뭐예요? 라는 질문에 가장 쉬운 설명은 걷게 해주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재활은 환자를 걷게 해주는 의료인 것이다.
하루 종일 절뚝거리면서 갑자기 나의 절뚝거리는 걸음 걸이가 마치 사람을 다루는 학문인 의학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다리는 양쪽 모두 성해야 절뚝거리지 않는다. 한쪽 다리 힘이 아무리 세도 다른 쪽 다리가 아프면 오래 걸을 수도, 멋있게 걸을 수도 없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기대어 최첨단으로 나아가는 한쪽 다리만 아끼고 치켜세우느라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들을 잊고 살고,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학의 다리가 약해지고, 아파져서 점차 절뚝거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현대 의학은 점차 절뚝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무릎은 내일이면 나아지겠지만, 의학의 다리는 누가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일까.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