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여자가 담벼락에 기대어 개를 안고 서 있다 뚱뚱한 개가 여자의 지루한 시간을 핥는다 근처의 나무가 꽃잎으로 얼굴의 시간을 파먹는다 아스팔트 위에 남은 물을 내다 버려서 누군가의 감정이 느리게 지나간다 저녁은 젖은 감정을 깡마른 늑골처럼 드러내고
지나가는 노인의 주름은 박물관에 걸린 회화의 물감처럼 지루하다 차곡차곡 세월을 쌓아 텅 빈 담벼락을 만들었다 푹푹 무릎이 빠져들어 가는 역사가 골목에 차 있다 사람들은 구불구불한 위장처럼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동네 빵집 안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도 화면은 슬로우 비디오 처럼 움직인다 사물의 윤곽은 의미가 무너지고 근처의 물건들과 겹쳐 보인다 집게로 빵을 집어 들면서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흐린 여자를 보고 있으면 남은 오늘이 연속극처럼 흘러내린다
울산시 서울산보람병원 소아청소년과장 / <시와사상>(2016)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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