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보건위생 '브나로드' 선구자
농촌 보건위생 '브나로드' 선구자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8.09.0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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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함께 농촌과 함께 외길
쌍천 이영춘 박사의 삶 < 1 >

개나리꽃이 왜 노랗지요? 나비는 어떻게 날아요? 비는 왜 와요? 밤은 왜 어둡고 낮은 왜 밝아요? 해는 누가 솟게 해요? 물을 왜 흘러요?….

다섯 살 '오째'의 궁금증은 끝모르고 이어졌다. 홀로 마당에 앉아서도 들길을 걸으면서도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은 이어졌고, 자연의 변화나 계절이 바뀌는 연유를 살피는 아이로 자라났다. 

쌍천 선생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대령리 84번지에서 태어났다. 동학교도였던 아버지 이종현과 어머니 김아옥 사이에서 난 5남 1녀 중 막내였다. '오째'는 남자형제 중 다섯 째인 그를 이르는 가족만의 이름이었다.

선친은 일제강점기 때 농사나 염전 일을 하면서 은밀하게 만주나 상해로 가는 독립지사들을 안내하고 군자금 루트를 확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의 쌍천 선생.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본과(4년), 사범과(1년)를 마치고 1923년 4월 성천군 별창학교의 훈도발령을 받는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의 쌍천 선생.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본과(4년), 사범과(1년)를 마치고 1923년 4월 성천군 별창학교의 훈도발령을 받는다.

열살이던 1912년 광양만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간 그는 새로운 사실을 배우면서도 다시 생긴 새 의문 속에 살았다.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물어볼 기회만 있으면 물었고, 물어볼 사람을 만나면 그냥 넘기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새로운 질문 속에서 선생님에게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게된 그는 책을 접하게 된다. 읽고 또 읽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낯선 세계로 가고 싶고, 더 넓고 더 많은 것들과 만나고 싶은 소망에 사로잡혔다. 그의 발길은 언제나 새로움을 향했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녔던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이미 두 형이 재학중이어서 세 명의 학비를 부담하기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그의 재기를 눈여겨 본 동네 유지들의 도움으로 배움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됐다. 평양고보에서는 그 역시 형들처럼 사범과를 지망했다. 4년의 정규과정과 사범과 단기과정을 마치면 보통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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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첫 '옥구청십자의료보험조합' 도입…전국민의료보험 기틀 다져 

사범과를 택한 이유를 묻는 평양고보 일본인 스승 와타나베 선생에게 그는 말했다.

"전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 궁금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또 그것을 알기 위해 선생님이나 어른들께 묻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되면 궁금한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1923년 4월. 그는 평양고보 사범과 1년과정을 마치고 평안남도 성천군 별창보통학교로 발령받았다. 그 곳에서 1년동안 의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자신이 어렸을 적 궁금증을 풀 길이 없어 답답해 하던 것을 잊지 않았다. 모든 학생들에게 자상하게 다가갔고 더 묻지 않아도 그 다음 과정까지 상세한 풀이를 곁들였다. 

첫 부임 1년만에 경상북도 대구의 수창보통학교로 전근한 그는 그 곳에서 농촌의 아픈 현실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결석이 지속된 한 학생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 학생이 이질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접한 것이다. 이 일은 평생을 농촌보건 개선에 몸바쳤던 연유가 됐다. 

보통학교 훈도로서의 삶에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그는 제1종 교원시험에 응시하고 이내 합격했다. 정식 교사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호사다마…. 또다른 새로운 미래를 꿈꾸던 그는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는다. 

진단은 습성늑막염. 의사는 안정을 취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도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결국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한 그는 바로 위 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황해도 신막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세브란스의전 출신인 의사 김찬두에게 치료를 받으며 의업에 대한 소명을 일깨운다. 형과 주위의 도움으로 그에게 새로운 길이 펼쳐진 것이다.

그는 1925년 3월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한 후 1929년 3월 졸업한다. 애비슨(O. R. Avison) 세브란스의전 교장의 졸업식 축사는 쌍천 선생에게 삶 내내 의업의 지표로 가슴에 새긴다.

"…예방은 치료와 달리 여러분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이름을 드날리는 사업도 아니고 누군가가 눈여겨보아주지도 않습니다. 예방의학은 인류와 사회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사업입니다. 여러분은 공중보건에 좀더 많은 시간과 연구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공중보건은 의학연구의 최종목표인지도 모릅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예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방법적으로 훨씬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이 목표를 앞당기기 위해 여러분은 대중에게 보건과 공중위생의 중요성을 계몽해야 합니다…."

그는 졸업과 함께 생리생화학교실 조수로 채용돼 1년동안 첫 영문논문 '조선인 여학생의 월경초조'를 비롯 여덟 편의 논문을 <China Medical Journal> <조선의학회지> <일본병리학회지> 등에 잇달아 발표했다.

촉망받는 교수로서, 의학자로서의 앞길이 열려 있었지만 쌍천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진 가족들을 위해 세브란스의전을 사직하고 황해도 평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원의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세브란스의전 근무시절의 쌍천 선생.
세브란스의전 근무시절의 쌍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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