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방학 계획표
청진기 방학 계획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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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2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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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아~ 즐거운 방학이다!! 제목을 크게 적어 놓고는 컴퍼스를 꺼내 큰 원을 시계 모양으로 그린다. 0시, 6시, 12시, 18시, 24시를 각 사분면에 표시한다. 몇 시에 자면 좋을까, 몇 시에 깰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잠자는 시간을 계산해서 가장 큰 면적으로 표시해 놓고는, 아침·점심·저녁 식사 시간을 3군데 나누어 맛있게 밥 먹는 수저세트와 밥상 그림을 그려 넣는다.

"저녁 9시부터 아침 8시까지 꿈나라…12시에서 1시는 맛있는 점심, 공부도 조금, 운동도 조금…." 
 나머지 시간을 채워 넣으며 방학 일정표를 만드는 것이 방학의 시작이었다. 

물론 작심삼일이라고 늘 방학 계획은 방학 시작 후 3일이 지나면 무너졌다. 기상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결심했던 계획들을 끝까지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개학이 내일로 다가오면, 일기는 한달치가 밀려 있었다. 

몇 주 전 월요일 날씨를 알아보려고 아빠가 쌓아 놓으신 신문더미에서 신문을 찾아서 '흐림'이라고 적어 놓고는, 가물 가물거리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 시제로 바꾸면서 소설을 쓰듯 쓰곤 했다. 

매일 꾸준히 104.5Hz 교육 방송을 듣고 완성하려 했던 탐구생활은 개학 하루 전 당일치기로 겨우 완성시켜 제출하곤 했다. 그래도 새로운 백지의 시계에 무언가 남이 정해준 스케줄이 아닌 나름 자유를 맛보며 시간을 계획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이번 방학 때는 뭐하지? 라는 질문은 상상만 해도 좋지 않는가?

대학시절에는 '프랭클린 플래너'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이어리가 유행했다. 플래너의 가죽 커버와 일년 치 속지를 선물해주는 것은 친구에게 생일날만 특별히 주는 고급스러운 선물 중 하나였다. 속지도 달 단위, 주 단위, 일 단위를 각각 맞춤식으로 선택해서 색색별로 준비해 주었다. 좋은 계획이란 무엇인가 라는 종류의 책들은 늘 서점 한 코너를 아직도 가득 채우고 있지 않는가? 

플래너는 단순히 수첩 이름만은 아니다. 전략가·기획 관리자·설계자의 전문성이 점점 필요로 하는 시대에 인생의 전략을 세워주는 전문가라는 직종은 참 매력적인 직업이다.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고 피터 드러커가 말하지 않았던가.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일분 일초 단위로 시간을 나누고, 행위를 분류하고 구조화 시키는 것은 효율을 높이며 이 시대를 살기 위한 최적화된 방안이었고, 나도 모르게 습관화된 사고방식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부어서 오셨어요?"
"죄송해요 선생님, 지난번에 너무 피곤해서 하라고 정해주신 관리는 제대로 못했어요. 근데 너무 힘들어요. 잠자기도 힘들고, 기억도 안나고…."

가끔 고개를 푹 숙이고 죄책감에 도리어 미안해하는 환자들이나,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투덜거리며 원망하는 환자들을 볼 때는 양가감정이 든다. 지키지도 못할 과한 목표량을 세운 것은 아닐까? 이 정도는 그래도 습관을 잘 들여 할 수 있도록 좀 더 강하게 끌어가야 할까? 

"그래도, 매일 이 정도는 운동 하셔야 해요! 아셨죠?"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무엇을 관찰하면서 해야 할지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윽박지르는 실력 없는 선생의 모습이지는 않았을까? 점점 더 나빠지는 체력에 좌절하지 않고, 그날 하루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목표를 일단위로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진행성 암 환자분들에게는 어떻게 하루를 설계하도록 해야 하는가? 어제와 다르게 점점 허약해지는 그들 앞에 100점 만점의 정상의 기준으로 만든 프랭클린 계획표는 그들에게 어쩌면 또다른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초등학교 방학을 맞이하는 심정으로 매일 흰 도화지에 올려두고, 가장 소중한 일들로 하루의 시계를 채워보는 일이 필요할지 모른다.

<어른 없는 사회>라는 책을 쓴 우치다 타츠루는 아이 같은 어른이 늘어나는 시대에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두가 '파이'를 두고 싸우는 중이니 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한다는 식의 차갑고 날카로운 상처 주는 가시 돋친 말들이 넘쳐나고 있다. '자. 그렇게 너무 초조해 하지 말고'라든지, '앉아서 차나 한잔 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봅시다'처럼,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 천천히 지혜를 모아 보자는 해법에는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나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이야기 한다. 
"괜찮아. 잠깐 정신 좀 차려 보자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시간을 두고 같이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을 한 어른으로 늙어가는 현명한 의사가 보고 싶어진다.

오늘 우리는 우치다가 이야기하는 어른이 없는 사회를 살고 있고, 어른이 필요한 환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 분들에게 어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릴 때 시계로 시간표를 만들어가던 느낌으로 시간을 나누고, 좋은 행위를 적어보고, 개학을 기다리는 아이의 시선을 느끼고 싶다. 

친구에게 선물 받는 고급스런 가죽플래너는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성공을 목표로 한 부담스러운 계획들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 작은 시간표들을 남기고 내일로 또 내일로 살아가는 것은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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