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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휘게(hyg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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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0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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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소피 아빠시죠. 아이 문제로 잠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유치원에 다니는 소피의 아빠 한스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한편 불안하다. 아이가 입고 간 옷 때문이었다. 아내가 아침에 소피 외할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급히 가느라 한스가 아이를 챙겨서 유치원에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소피가 며칠 전에 친척이 사준 드레스를 입고 간다고 우기는 거였다. 몇 번 타일렀지만 엄마와는 달리 뜻을 잘 받아주는 아빠라 그랬을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내가 갑자기 자리를 비운 탓에 출근 시간이 바빠서 어쩔 수 없이 드레스를 입혀 유치원에 보냈던 게 마음에 걸렸었다.

"오늘이 우리가 모르고 있는 소피의 특별한 날일까요?"
평소와 달리 선생님의 말투에는 무언가 곤란한 얘기를 할 때의 어색함과 정중함 그리고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한스는 민망하고 미안했다.

"미안합니다. 오늘 집사람이 병원에서 급한 전화를 받고 나가느라 제가 챙기면서 실수를 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어쩐지 머리칼도 정리된 게 다르다고 느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네요. 아이들은 아빠에게는 응석을 부리고 싶어 하는 법이죠. 소피의 옷도 그래서 생긴 일이겠네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아시죠?"

"물론이지요. 소피에게 잘 얘기하겠습니다."
한스는 소피를 데리고 오면서 유치원 입학 때 원장이 간곡하게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좋은 것을 보면 무조건 갖고 싶어 하기에 그 뜻대로 해주다 보면 모두가 경쟁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고 소외당하는 애들이 있으니 튀지 않는 수수한 차림으로 등교하도록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피는 다행히 잘 이해했고 생일이나 파티가 있는 날에만 드레스를 입겠다며 한스의 볼에 입 맞추었다.
오후 네 시경 집에 도착한 한스는 병원과 직장을 오가며 힘들었을 아내를 생각하며 음식을 준비했다. 소피도 고사리 손으로 거들었다.

거실에는 은은하게 촛불을 켜고 구석진 곳에는 작은 램프를 켰다. 식탁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한스가 직접 구운 생강과자, 소피가 즐기는 핫 초코가 간단한 빵과 스프와 함께 놓여졌다. 아내는 오늘따라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집안 분위기에 눈시울이 뜨듯해진다. 소피의 손을 잡아 기도하듯이 깍지를 끼어 가슴 쪽으로 이끈다.

"소피. 할머니도 집에 오고 싶어 하셨어. 양초가 켜지고 크리스마스트리 작은 전구들이 반짝거리는 켜진 거실에서 소피 손을 만져보고 볼도 비벼보고 싶다고 했지. 소피의 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음식보다 달콤한 얘기도 듣고 싶다고 하셨지. 가족이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는 시간을 다시 가질 수 있을지 물었어."

아내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고 소피는 엄마를 꼬옥 안았다. 소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깜박이자 반짝이는 물방울은 별이 되어 아내의 뺨과 마음에 은하수가 되었다. 덴마크의 저녁이 깊어져 간다.   

위 예시는 덴마크인들이 사랑하는 '휘게'를 그려본 것이다. 
휘게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락함이나 만족함 정도에 해당하는데, 단순하고 소박한 행복이나 흡족한 느낌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휘게라는 단어에는 특별한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울림을 한 번 따라가 보자. 덴마크에서 만났던 현지 가이드의 말을 빌리면,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을 설명해주는 한 마디가 휘게라고 했다.

그들은 소탈하게 꾸민 집 안에서 가족이 함께 일하고 소박하게 만든 음식을 다 함께 나누어 먹고 어떤 대화든지 격의 없이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대화는 서로를 존중해 예의에 어긋나지 않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여 집중하며 어느 누군가가 독점해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감하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들은 그래서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한마음으로 힐링된다고 했다. 그들은 그러한 삶을 가장 행복하게 느낀다고 했다.

또 하나 휘게가 비단 가족과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 행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본인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배려한다. 직장에서도 지역사회에서도 나라 전체가 다 그런다. 그들이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다.

요즘은 서구에서도 휘게에 관심이 많아졌다. 언론에 소개되자 전 세계의 반응이 뜨거웠다. 휘게 라이프를 소개하는 서적이 세계 각국에서 출간되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히는 덴마크의 행복의 비밀을 휘게에서 찾으려고 한다.

덴마크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이유로 손꼽히는 데에는 분명 높은 복지 수준과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 자체가 어려운 행복이 아닌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행복들이라는 것이다. 좋은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에너지. 간소한 물건과 느리고 단순한 삶.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는 것.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 그리고 함께 하는 것.

2년 전 덴마크를 다녀온 후부터 휘게에 관한 나의 갈증은 지속되고 있다. 행복은 많고 크고 높아야 된다는 내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내게도 휘게가 오려나? 

행복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커다란 행운이 아니라 매일 발생하는 작은 친절이나 기쁨 속에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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