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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4-19 11:38 (금)
청진기 시간과 이야기

청진기 시간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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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3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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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벚꽃이 제대로 만개하기도 전에 강풍과 비바람으로 우수수 다 떨어져 버렸다. 작년에는 탄천을 따라 얼마나 멋스럽게 피어 있었던가. 며칠전 내린 비에도 견딘 꽃잎들이 강한 바람에는 버티질 못했다. 아쉽다.

날씨가 그사이 많이 포근해졌다. 며칠 후 다시 걷는 그 길에서 다른 봄을 보게 된다. 그 사이 나무는 자라 변해 있었다. 떨어진 꽃송이 자리에 부지런히 잎들은 자라고 있었다. 떨어져 버린 꽃잎에 아쉬워하지 않고 열심히 이파리를 내보이며 나름의 신록의 싱그러운 잎들로 무성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자라고 있는 모습이 고맙고 장하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의 흐름은 의학에 어떤 의미를 줄까? 질병에 대해 공부한 본과시절, 진단 다음 챕터는 natural course(경과)이지 않았던가. 급성기·만성기·회복기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질병의 성격은 변해가고 회복의 정도도 변해간다는 접근은 질병 자체를 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할 때조차 유용한 개념이다.

질병은 물리적 시간에 의해 변화한다. 감기는 보통 1∼2주 지나면 낫지만, 당뇨는 평생을 관리해야 하듯, 질병 마다 시간의 속도와 변화의 주기는 달라진다. 

질병 자체도 시간에 따라 달라지지만, 질병을 겪어내야 하는 환자 또한 변한다. 환자란 질병 자체를 각종 회복 기전으로 이겨내는 생물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질병이라는 사건을 만나 겪어내면서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해 나가며 변화하는 실존적 존재인 것이다. 그 실존적 존재인 환자와 의사가 임상적으로 만나면서 의학은 시작된다.

의사로서 가장 기분 좋을 때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환자가 다시 찾아와 "선생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이리라. 공치사 일지언정 무언가 뿌듯하고 보람찬 기분이 든다. 몇 주 전 만나 어떤 처방을 내렸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 사이 시간동안 좋아진 모습으로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환자들을 보면 오히려 의아해할 때도 있다.

어떤 것이 좋았을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이 경험하곤 한다.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해주고 설명해준 것 같은데,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나가거나 "별로 좋아진 게 없어요"라고 다시 찾아와 이야기하는 환자들을 만나면 대략 난감해진다. 같은 진단에 특별히 다르게 처치한 것은 없는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시작된 임상적 만남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질병의 치료라는 목적을 공동으로 두고 해결을 위해 상호 이야기하는 행위가 원래의 진료 현장이었다. 최첨단 기술로 포장된 현대 의학을 접하며 각종 진단과 치료에 사용되는 기계와 공학이 융합이 강조되는 현장에서 오히려 우리는 이야기를 잃어버렸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어떤 답을 들어야 할지…. 게다가 어떤 것을 약속하고 다음에 만나야 할지….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잃어버려서 차이를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의 흐름은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환자의 경험은 이야기다. 그것도 짧은 단편이 아니라 긴 서사시이다. 숱한 과거의 경험들과 현재의 관계들이 엮인 거대한 이야기이다. 난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아웃 오프 아프리카의 작가 아이작 다넨센의 글이 생각난다.
"어떤 슬픔이라도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후에 외래가 끝나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A 장조 2악장 아다지오를 찾아 들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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