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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의정승 명재 윤증을 엿보다"
"조선 백의정승 명재 윤증을 엿보다"
  • 윤세호 기자 seho3@doctorsnews.co.kr
  • 승인 2018.04.29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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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종가 보물 제1495호 '윤증 초상'·'영당기적' 전시
경종 '시호 교지'·조선 문인 친필 편지 볼 수 있어
전시장 전경ⓒ의협신문
전시장 전경ⓒ의협신문

5월 13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한국서예사특별전 34 : 명재 윤증'展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핵심 인물이자 소론의 영수(領袖)인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의 유물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선보이는 전시다. 

주요 전시작으로는 명재 윤증 초상(보물 제1495호), 영당기적(보물 제1495호), 친필 주자시, 친필 소옹시, 친필 절명시, 동토 윤순거 친필 이백시, 송시열·김장생·윤휴의 친필 간찰 등 국보급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윤증 초상'과 '영당기적' 두 점의 보물….  윤증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초상 5점과 초상 제작관리 내력이 상세히 적힌 '영당기적'은 2006년 보물 제1495호로 지정됐으며, 이번 전시에는 이명기가 1788년에 구법으로 그린 초상이 '영당기적'과 함께 전시됐다. 윤증의 초상은 생전에 변량이라는 화가가 처음 그린 후 윤증 사후 장경주·이명기·이한철 등에 의해 제작됐다.

명재 윤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산림으로,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았다. 그는 8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학문적, 인격적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지방에 거주하며 권력과 거리를 두었던 그를 두고 '백의정승'이라 불렀다.

조선 19대왕 숙종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윤증에게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특히 조선의 정치사에서 윤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치열한 논쟁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언제나 화합과 평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86년 삶동안 단 한번도 벼슬길 오르지 않았지만
소론의 영수로 추앙된 백의정승 명재 윤증"

경종이 내린 '시호 교지'

명재 윤증의 집안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46명이나 배출할 만큼 명문가였다. 그의 집안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이 9명이며, 특히 윤증(문성공)은 조부인 문정공 윤황(尹煌, 1571∼1639), 아버지 문경공 윤선거(尹宣擧, 1610∼1669)와 함께 3대에 걸쳐 시호를 받기도 했다.

비록 윤증은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의 학문과 교육은 전국의 선비들을 매료시켰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시호 교지'는 1723년 조선의 20대왕 경종이 윤증에게 내린 것이다.

 

윤증 초상, 1788년, 이명기 작,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의협신문
윤증 초상, 1788년, 이명기 작,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의협신문

명필 3형제 윤증 글씨 낳다

명재 윤증의 집안은 명문가이면서도 명필가였다. 그의 큰아버지인 동토 윤순거(童土 尹舜擧, 1596∼1668)는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초서로 쓴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는 보물 제1671호로 지정돼있기도 하다. 

또 윤문거,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 역시 글씨가 뛰어나 이들 삼형제의 글씨를 모은 '노성3선생필적'에는 박세당·박세채 등 당대 이름난 인물들이 발문을 쓰기도 했다. 윤증 역시 가문의 영향으로 빼어난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다. '명재 친필 주자시', '명재 친필 8폭병풍' 등의 작품을 통해 윤증의 경쾌한 초서를 감상할 수 있다.

 

영당기적, 작자 미상, 1885년ⓒ의협신문
영당기적, 작자 미상, 1885년ⓒ의협신문

노론과 소론 분화의 시작 윤증, 송시열 그리고 '신유의서'

조선후기 서인이 정권을 잡은 후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보인 노론과 온건한 입장의 소론으로 분화됐다. 한 때 스승과 제자 관계였던 우암 송시열과 명재 윤증은 각각 노론과 소론의 영수가 돼 정국을 이끌게 됐다.

윤증은 송시열이 윤휴 등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자 이를 비판하기 위해 송시열에게 보낼 '신유의서'를 작성했다. 윤휴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오랜 벗이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윤증과 송시열의 이러한 갈등을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르며, 노론과 소론의 분당 계기로 작용했다.

 

명재 윤증의 친필 절명시ⓒ의협신문
명재 윤증의 친필 절명시ⓒ의협신문

선비들과 나눈 편지, 조선 문인들의 대화 엿보다

윤증은 조선후기 존경받는 대학자였던만큼 동시대 인물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윤증이 주변 인물들과 주고받은 간찰들은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송시열·김장생·윤휴·박세당·허목 등 당대 최고학자들의 친필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간찰 자료를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명재 종가 유물을 중심으로 총 4가지 주제로 구성되며, 1섹션에서는 윤증 선생의 친필·문집·초상 등을 중심으로 명재의 삶을 2섹션에서는 윤증 선생의 가계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을 조명했다

3섹션에서는 당시 윤증 선생과 교류하던 학자 및 문하생들의 친필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4섹션에서는 조선후기 윤증 선생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 등이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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