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C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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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세호 기자 seho3@doctorsnews.co.kr
  • 승인 2018.04.13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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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C Life

골수분자로 태어나 열혈분자로 살아 왔어
비록 몸은 작지만 붉은 태양을 닮았지
둥근 것들은 대부분 세상을 빈둥거리지만
난, 한순간도 쉬지 않고 둥글고 긴 배관을 달려왔을 뿐이야
산소통을 등에 메고 
심장을 뛰쳐나와 밀림 같은 허파 속을 헤집기도 하고
붉은 광장 같은 뇌 속에서 잠시 휴식하다가
적색분자로 오인 받아 고개를 떨군 적도 있지
몹시 흥분한 사람들은 나를 보자고 
나를 봐야 끝장이 난다며 가슴을 쥐어뜯지만 
막상 나를 보고 나면 
내 몸에서 역겨운 비린내가 난다며 뒤돌아 서 버리지
짜증 섞인 보자기에 나를 싸서 
한 달에 한 번씩 휴지통에 몰래 버린 숙녀도 
탯줄을 자르는 순간 성스러운 내 몸을 똑바로 쳐다보진 못해
과거있는 여자처럼 무작정 나를 드러내기도 힘들어
요즘엔 심장이 쿵쾅대는 첫날밤에도
나를 만나기가 쉽진 않아
하얀 시트 위에서 기어이 나를 보겠다고 
심장을 펌프질하며 
무릎을 찧어대던 메뚜기 닮은 사내들도
까진 무릎을 보며 제 자신을 달래기 일쑤지
사람들은 내가 조금만 부족해도 낮달처럼 창백해져 
금세 부족한 날 채우겠다고
선짓국을 들이마시며 검은 똥을 싸대기도 해
가끔  증오에 가득 찬 사람들이
손목을 그어 나를 내동이 칠 때 삶의 비애를 느끼지만 
사그러드는 목숨을 위해 기꺼이 내 몸을 바칠 때 
존재는 더욱 빛이 나지
그럴 때 나의 부재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난 골수에서 재생되면 그만이니까
인간의 욕망이 나를 통해 백년세수를 달리는 동안 
난 기껏해야 서너 달 산소를 운반하다가
배달의 힘이 부족하면 깨끗하게 현장에서 물러나지  
난 골수분자로 태어나 열혈분자로 살다가 
비장하게 비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거야

 

김연종
김연종

 

 

 

 

 

 

 

 

경기도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2004년 <문학과 경계> 등단/시집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산문집 <닥터 K를 위한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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