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바른 소리, 의료를 위한 곧은 소리
updated. 2024-03-29 12:28 (금)
청진기 순간의 소중함
청진기 순간의 소중함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8.04.02 09:38
  • 댓글 1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우연히 본 동영상에는 영양처럼 생긴 멋진 동물이 있었다. '스프링벅(springbok)'이라 했다. 귀엽게 생긴 뿔이 빛났고, 몸은 부드러운 갈색으로 덮여 있었다. 무리를 지어 달릴 때 랜드 마크가 된다는 엉덩이와 배는 하얀 털로 덮여 갈색과 투톤으로 잘 어울렸다.

눈과 귀가 커서 순해 보이고, 머리가 작고 다리가 길어 날렵해 보였다. 키가 75cm 정도이지만 2∼3m까지 점프할 수 있으며 특기는 뜀박질이라 했다. 동물 중에서 시속 113km로 달리는 치타, 97km로 달리는 프롱혼에 이어 스프링벅이 세 번째로 빠르다고 했다. 시속이 94km인데, 단거리가 아닌 중장거리에서는 지구력이 강해 치타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한다.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다가 어느 한 순간 모두가 불안해지면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곤 하는데, 이를 '스프링벅 현상' 또는 '밴드왜건 현상'이라고 한다. 이는 스프링벅이 겁이 많고 달리기가 빠르기에, 놀라면 무조건 뛰고 한 마리가 뛰면 주위가 덩달아 뛰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개구리가 폴짝 뛰거나 앞쪽의 풀을 먹기 위해 뒤쪽의 한 마리가 앞으로 나가면, 옆에 있던 동물과 앞에 있던 동물 그리고 앞의 앞 동물이 덩달아 달린다. 그런 식으로 그 뜀뛰기는 맨 앞의 행렬까지 이어진다. 뒤에서 계속 달리면 앞에도 달려야하니 한번 뛰면 좀처럼 멈추는 법이 없다. 어디까지 달려야 하는 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설사 앞쪽에 절벽이 나오더라도 멈추지 못한다. 

내가 스프링벅처럼 앞만 보고 달린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언제부터 그렇게 살았던 것일까? 혹시 지금도 그렇게 달리고 있지는 않는 걸까?

36살에 처음으로 개업했다. 잘 해낼 자신은 있었는데 실패했다. 그런데다가 원인 파악도 못했다. 환자가 없는 대기실을 처량하게 바라보면서 장소를 잘못 선택한 나를 끝없이 아프게 했다. 그러나 문제는 장소가 아니었다. 이전하고 나서도 별반 나아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문제가 있다고 느낀 것은 그러고도 상당히 시간이 지나서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 미숙한 것도, 부족한 것도 많았다. 쓸데없는 자존심만 하늘을 찔렀다.

고삐를 조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려던 차에 의료계 파업이 있었다. 
졸속 의약분업을 반대하는 초강경 투쟁이었다. 한 달여간 파업에 동참하고서 병원에 돌아오니 눈앞이 캄캄했다. 
경제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잠도 오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한 게 아마도 그 때부터였을 거다. 

주 2회 9시까지 야간 근무. 공휴일, 일요일에도 오전 근무했다. 개원에 도움 되는 학회나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내 전공 분야가 아닌 것도 배웠고, 비 보험 분야도 공부했다. 병원 경영 관련 세미나에도 참여했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동창회·봉사 단체·종교 활동에도 열심히 동참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달리다가 그 후에는 멈춰 있으면 불안해서 달렸다. 내가 달리니 모두가 달리는 것으로 보여 멈출 수가 없었다. 한 발짝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야 된다고 스스로 닦달했다. 적어도 6∼7년을 그랬다. 

집 앞 도로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을 숱하게 밟고 지나갔으련만 그 가로수가 은행나무였다는 사실을 안 것이 이전 개업하고 나서 6년만이었다. 서울에도 날씨가 좋으면 별이 보인다는 것을 안 것도 그 즈음이었다.

개업한 지 10년 정도 되자 고혈압·고지혈증이 발병하고 관절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검진을 받을 때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 달려도 되는 것인가?'

건강에 자신이 없게 되자 건강을 위해서 또 달렸다. 약을 챙겨먹고 건강식품도 먹고 체중을 빼고 운동을 시작했다. 웰빙·웰다잉·웰에이징에도 관심 갖고 공부하다보니 이것 또한 숨이 차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는 것은 확실히 답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 즈음 때 만난 게 장자(莊子)였다. 어디 한 번, BC 300년에 활동한 장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심장이 터져 죽어버리고 말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면 될 것을'(최진기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 참조). 

간단했다. 잠시 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달리고 싶을 때까지 달리고 가고 싶은 곳까지 가고자 한다면 쉬었다 가면 될 일이었다. 

군의관 훈련 때 영천의 훈련장은 얼마나 춥고 바람이 불었던가! 짧은 휴식시간에 한줌의 햇빛을 좇아 바람 막아주는 벽을 등지고 옹기종기 모였다. 그때 먹던 과자는 또 얼마나 달콤했던가. 돌이켜보면 그 휴식의 달콤함이 훈련을 잊게 하고 끝까지 참아낼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항상 짧았다. 너무 짧아서 시간이 그대로 멈추기를 바라기도 했다. 14시간을 날아가 감격에 겨웠던 순간도 역시 짧았다. 그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사진으로 바꾸고 또 14시간을 날아왔다. 하지만 충분히 위로받았다고 느껴지고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남아있다. 순간이 중요한 것은 때론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할뿐더러 삶을 사랑하게 하고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는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스프링벅이여. 
잠시 멈춰서 너희들이 일으킨 흙먼지의 날개 짓을 쳐다보렴, 목이라도 한 번 축이고.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