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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행운"이었던 54년간의 여정
"그저 행운"이었던 54년간의 여정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8.03.1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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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 김임 원장(전북 전주·김임신경정신과의원)

반백년 넘게 이어진 소중한 마음이 있다. 

누군가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며 내디딘 첫 발은 시간의 두께를 더해가며 일상이 됐다.

어디든 가겠다는 그의 다짐은 도서 산간 격오지와 나라 안팎을 구분하지 않았고, 이웃의 아픈 마음을 달래려 건넨 손길은 그늘진 곳에 사랑으로 포개졌다.

쉼 없이 지나온 삶의 흔적은 꺼지지 않는 작은 촛불처럼 곁을 밝히고 있지만, 그에겐 당연한 '의사의 길'이었다.

그 오랜동안 변함없이 외롭고 소외된 이들 곁을 지키며 지친 몸과 마음에 힘겨워하는 이들과 함께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34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수상자인 김임 원장(전라북도 전주·김임신경정신과의원)은 "그저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제34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수상자인 김임 원장은 의대 재학중에 시작한 봉사활동을 일흔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김 원장이 20여년간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던 환자와 가족이 치유된 후 감사의 뜻으로 보내온 종이학을 들고 웃고 있다.

1964년 전남의대 재학 중에 시작한 봉사는 일흔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이어진다. 시간은 강산의 옛 모습조차 가물거리게 흘렀지만 처음 마음은 그대로다.

"의대 재학중에 두 곳의 봉사단체에 가입하면서 무의촌 마을을 중심으로 각지를 찾아다녔습니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나 반갑게 맞아줬던 얼굴들, 봉사를 마치고 마을을 떠날 때면 아쉽고 서운함에 돌아서 있다가도 이내 환한 웃음으로 우리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그 분들의 마음이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나온 세월이 긴 만큼 특별한 인연이나 남다른 신념이 있지는 않았을까.

"특별한 신념보다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몸담다보니 오늘까지 왔습니다. 때로는 삶 가운데 도전이기도 했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 스스로에게 용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봉사를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게 제겐 큰 행운이었습니다."

의사와 크리스천. 두 모습이 그의 삶을 비춘다.

"가난했던 초등학교 4학년 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먹으려고 찾아간 교회가 평생 신앙인으로 살게 된 연유가 됐습니다. 지금은 전주 완산교회 원로장로입니다. 영적인 섬김은 제 인생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사실 그는 의사보다 파일롯이 되고 싶었다. 의대에 앞서 공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사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서울 공군회관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왼쪽 내이에 문제가 발견됐습니다. 수술한다는 조건으로 합격했지만 수술비용이 80만원이나 됐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는 큰 돈이었습니다. 결국 사관학교를 포기한 후 외삼촌의 권유로 의대를 입학하게 됐습니다."  

그에게 봉사는 삶 자체이며 일상이다. 의사이기에 더 그랬다.

"신체만 치료하기보다 마음까지 치료하는 데 매력을 느껴서 정신건강의학을 전공했습니다. 덕분에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아픔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후에 가정의학을 접한 것 역시 의료봉사의 영역을 조금 더 확장할 수 있겠다는 기대에서 비롯됐습니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한걸음 더 환자에게 다가가려는 깊은 속내 때문이었을까. 진료현장에서 그는 항상 '명의'였다.

"무의촌 의료봉사 당시에는 지원된 약 종류가 많지 않았습니다. 위약효과인지 소화제나 아스피린으로도 여러 증상이 완화됐습니다. 특히 설파다이어진의 약효는 최고였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의사 여럿이 진료하는데 제 환자들이 유난히 치료가 잘 됐습니다. 때아닌 감사 인사에 환자가 몰리기도 했습니다…(웃음)."  

무의촌에서 시작한 봉사 여정은 뇌전증 환자 지원 모임인 40여년간의 '장미회' 활동으로 이어진다. 오해와 편견에 힘겨워하는 이들을 보듬으며….  

"박종철 선생님(제23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수상)의 소개로 세브란스병원 전공의 1년차이던 1970년 '장미회'와 인연을 맺은 후 2015년까지 뇌전증 환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근무지가 바뀌면서 장소는 달리했지만 어느 곳에서나 '가시가 있는 장미가 아름다운 것처럼 뇌전증 환자도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국내 봉사활동에 주력하던 그는 1985년부터는 해외로 지경을 넓힌다. 처음으로 밟은 땅은 러시아였다. 

"30여년전 우연한 기회에 옛 소련의 공군기지가 있던 모즈독지역 의료봉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 곳에서 만났던 고려인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애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 해마다 1∼2차례 가깝게는 동남아시아에서, 멀리는 인도양까지 의료 취약지나 재난지역을 찾고 있습니다. 올해도 추석엔 몽골, 10월에는 중국 연변 방문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의 봉사는 품이 넓고 깊다. 의료에만 머물지 않는다. 생명의 전화·가정법률상담소·가정폭력상담소·성폭력예방치료센터…. 손길이 닿은 곳에 그는 여전히 머무른다.

"1974년 전문의과정을 마치고 서울시립정신병원 봉직을 시작하면서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님의 권유로 생명의 전화 전신인 의료상담전화를 시작했습니다. 그후 거처를 전주로 옮기면서 전주 생명의 전화로 이어졌습니다. 성폭력예방치료센터는 1991년 발생한 '김부남사건' 때 그녀의 주치의로 도운 것이 인연이 돼 1994년 창립해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가정폭력상담소와의 인연도 1994년부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병리현상 치유에 작게나마 보탬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각종 매체 기고 및 강연을 통해 오피니언 리더로서 국민에게 다가서고 있다. 왜곡된 의사의 모습과 의료현실을 올바르게 알리고 싶다.

"각계에서 강연 요청이 조금 있습니다. 호스피스·자살예방·웰다잉·4차산업혁명시대 젊은이의 역할 등을 주제로 각급 병원이나 기관 직원들을 상대로 강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새로  전라북도의사회장에 선임된 백진현 회장께서 저를 고문으로 위촉했습니다. 부담이 앞서지만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입니다."

멋진 외도일까 마니아의 여가일까. 그는 진료, 강연, 봉사의 바쁜 일정 속에도 전주 첼리스트앙상블 후원회장, 전북 CBS합창단 단장, 호남오페라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전북지역 굵직한 예술단체의 든든한 후원자로 이름을 올렸다.

"제 아들도 성악을 전공하고 지금은 오페라 연출을 하고 있지만, 사실 지역사회 예술인들은 힘듭니다. 특별히 조예가 깊어서 관계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다가서게 됐습니다. 정년퇴임 후 시화를 즐겨하는 아내의 예술적 성향도 한몫 했습니다."  

그의 곁에는 평생 도반(道伴)인 정영숙 전북대 명예교수(간호학)가 있다. 봉사와 헌신의 삶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내였다.

"수상소식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 뜻대로 살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아내와 또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것은 모두 아내 덕입니다. 아내는 시간과 재물의 쓰임에서는 오히려 저보다 손이 큽니다. 항상 응원해주며 평범한 삶 속에 부자의 마음을 심어준 아내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전합니다."

어릴 적 따뜻한 우유 한 잔에 이끌려 들어선 교회당은 신앙의 길이 됐다.

쉰 해 넘게 이어진 봉사와 헌신은 사랑이 됐다.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디서나 이어지는 인연은 배려와 존중이 됐다.

그는 말한다.  

"좌절하지 마세요, 인내하세요, 그리고 사람답게 의사답게 세상과 더불어 살아보세요…."

오늘, 그로부터 내일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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