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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아버지, 당신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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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1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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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삼일절 특별기획으로 3·1만세운동 영남대표지역인 천도교 경주군교구의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대한 얘기가 기사로 3회에 걸쳐 보도됐다.

당시 3·1운동 때의 우리 할아버지의 얘기와 아직도 손병희 선생님이 계시던 천도교를 지키고 있는 숙모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프랑스의 쟌다르크처럼 숨겨진 심장 한 부분이 뜨겁게 달구워져 옴을 느꼈다.

일자리를 찾아 헤메이는 청년들이 아파도 어금니를 물고 버티고 있다는 구전이지만, 가계부의 외상장부는 두꺼워져가고만 있다는 현실이다.
며칠 후면 제40대 의협회장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국민 건강과 의사면허를 위협하는 의료현장의 현실속에서 위기에 빠진 의료계를 구할 쟌다르크는 과연 누구일까?
덕목과 카리스마가 그리고 이힘든 의료계가 그 목적을 제대로 달성할수 있는 나라를 사랑하는 그마음이 함께 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경주의 작은 마을 산래. 가을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푸른 초장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가 새로 단장한 문중의 산소들과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우리 집안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를테면,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나는 경주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고, 어쩌면 의사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 가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일제강점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라를 빼앗긴 뒤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당시 할아버지와 함께 활동한 인물이 손병희 선생이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반역' 활동이 발각되면서 우리 가문은 경주에서 울릉도로 터를 옮겼다. 일종의 유배였다. 

울릉도에서는 살길이 막막했다.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다시피 하고 떠나온 길이었다. 그때 울릉도에 살고 있던 명망이 높은 어른 한분이 할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분은 해주 출신으로 중국에서 학교를 다닌 인텔리로 지성과 어진 품성으로 울릉도에서 두루 명망을 얻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몇몇분과 함께 울릉도 작은 마을에 학교설립을 계획하셨다. 두 어른이 가깝게 지내다보니 자녀들도 친해졌다. 할아버지의 아들과 어르신의 딸이 결국 웨딩마치를 울렸다. 두 분이 내 아버지와 어머니다. 
어머니는 섬 소녀답지 않게 야망이 컸다. 뭍으로 나가 세상에서 마음껏 꿈을 펼치고 싶었다고 했다. 그 꿈을 접게 만든 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키가 189cm였다. 훤칠한 키에 하얀피부의 이국적인 외모,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셨다. 가수를 꿈꿨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꿈을 접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18번곡은 엄정행의 '목련화'였다.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면 "과년한 처녀들이 혼절"을 했다고 했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목소리와 준수한 외모를 떠올려보면 거짓말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을 훔친 결정적인 요소는 다른 데 있었다. 내 할머니는 아버지가 3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엄마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다. 당신이 '목련화' 다음으로 즐겨 불렀던 곡이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넘어오던 그날 밤을 언제 넘느냐
맨드라미 피고지고 몇 해이던가/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오늘밤도 불러본다 어머님의 노래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면서 저 노래를 불렀을 아버지를 떠올리면, 지금도 코끝이 짱하다. 어머니도 그랬던 모양이다.
"왠지 측은해 보이더라. 곁을 지키면서 돌봐주고 싶었어. 뭍으로 나가 세상을 훨훨 날고 싶은 마음을 깨끗하게 접었지."
어머니의 고백이다. 어머니는 날개를 접고 섬에 남아 평생 아버지의 애인이자, 아내, 엄마로 살았다. 그러나 초야에 묻히셨으면서도 젊은 시절처럼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 영어와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하셨다. 그 덕에 어머니에게선 늘 다양한 지식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어머니의 얘기에 흠뻑 빠져들곤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사업을 했다. "그 조그만 섬에서 무슨 사업"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울릉도에 꽤 많은 주민이 있었다. 초등학교만 8개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오징어 등이 잘 잡혀서 부자가 많았다. 한 마을에 텔레비전 한 대 있기 힘든 시절에도 울릉도는 가가호호 텔레비전과 전화기가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빨간가죽가방과 신데렐라의 구두보다 더예쁘던 빨간구두가 아직도 내머리속에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업을 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늘 뿌리를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내게 종종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떤 집안인지를 잊으면 안 된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셨다. 그러니 독립운동 가문의 후손답게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늘 베풀며 사셨다. 베푸는 방법도 참 지혜로우셨다. 
추석이 다가오면 아버지는 소를 한 마리 잡았다. 어머니는 고기를 자른 다음 자식들에게 고기를 배달시켰다. 대문을 나서는 우리에게 늘 "사람 있는가 보고 없으면 마루에다 살짝 놓고 오너라"고 시켰다. 혹시나 고기를 받는 사람이 계면쩍어 하지나 않을까 배려한 것이었다.

때로는 베푸는 것을 넘어서 과하게 돈을 쓸 때가 있었다. 집을 담보로 보증을 서주기도 했다. 아버지의 계산없이 베푸시는 일 덕분에 학교를 휴학한 적도 있던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결심을 하기도 했다. '얼굴 번듯하고 남한테 잘 주는 남자하고는 결혼하지 말아야지' 하는….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베풀며 사신 당신답게 아버지는 늘 "오로지 돈을 벌려고 어떤 직업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내가 의사가 된 것도 아버지의 권유였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사는 데는 의사만 한 직업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살아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섬은 의료 시설이 열악하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방학이 끝나고 나면 꼭 친구 한둘이 보이지 않았다. 방학 사이에 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큰 병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축구를 하다가 다치거나 복막염 같은 가벼운 병이 큰 병으로 깊어져 죽음을 맞았다. 모두 의료시설이 변변찮은 까닭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의사만큼 필요한 직업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된 후 꼬박꼬박 고향 울릉도와 같은 의료의 사각지대로 무료 진료를 다니고 있다. 그것은 학창 시절 의사가 부족하고, 약이 없어서 죽어간 내 친구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한 가장 작은 헌신이다.

아버지는 2002년 우리 곁을 떠났다. 돌아가실 때도 아버지답게 세상을 뜨셨다. 복지 사업을 하시는 삼촌을 도우러 갔다가 사고를 당하셨다. 그해 복지관 지붕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일을 도우려고 지붕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서 떨어지셨다. 남을 돕는 일에 늘 앞장서신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친가, 외가 어른들 모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셨던 분들이다. 직업을 선택할 때는 물론이고 일상에서도 늘 다른 이들과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서 실행에 옮기셨다. 
독립운동이나 애국이란 것도 그냥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말 거대하고 큰일이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가문이 세운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란 자연스럽게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직업이다. 그래 그런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데도 그분들의 면면이 다 기억이 난다. 어떻게 그렇게 기억이 잘 나는지 나 스스로 신기할 정도다. 

돌이켜 보면 고맙고 감사한 일들뿐이다. 아버지에게 세상을 보람되게 사는 법을 배웠고, 어머니에게는 실용적인 지식과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물려받았다. 게다가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덕에 부모님이 숙제로 남기신 삶의 목표를 원만하게 이루어냈다. 내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일이 있다면 그건 모두 부모님의 은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사과드릴 일이 있다. "잘생기고 잘 퍼주는 남자와 결혼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 외모는 모르겠지만, 후자는 오래 전에 철회했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보다, 더 훌륭한 삶이 없다. 아버지가 백 번 옳았다. 

오늘은 하늘이 유달리 파란 삼일절이다.
의료계를 구출할 6명의 수장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눈을 감는다.
아버지, 눈감으면 더 선명해 지시는 그모습, 오늘따라 당신이 몹시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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