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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8 17:57 (목)
청진기 방문객의 초대
청진기 방문객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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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2.2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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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안녕하세요? 성함이?"
병원 건물 내 위치한 커피점에 잠시 들러 '카페 라떼'를 주문하려다가 무의식적으로 툭 튀어 나온 나의 말에 옆에 있던 전공의 선생님도 깜짝 놀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전 내내 외래에서 40명이 넘는 환자분에게 했던 인사말이 입에 배어 무의식적으로 나왔나보다.
환자 보호를 위해 만든 이중 확인을 위한 멘트가 처음엔 참 어색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각인돼 간다.

외래 진료라는 현장에서의 만남은 의료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긴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경험하는 다양한 만남 중에 하나일 텐데, "안녕하세요? 성함이?"는 만남의 첫 인사로서 아무래도 어색하긴 하다.

5년이 넘게 보아 온 낯익은 의사가 매번 건네는 "성함이?"라는 인사는 환자에게는 낯설음이라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금 병원이라는 곳이 낯설게 느껴지게 되는 하나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해마다 이맘때면 다가오는 3월의 새로운 외래 스케줄 짜기가 한창이다.

"월요일 화요일은 양방, 목요일은 한방…"
현대의학과 한의학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다.
외래 진료실을 한군데만 사용할지 혹시 가능하면 두 방을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짜게 된다. 각 세션마다 환자수와 전체 진료실의 여유를 생각하며, 어떤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 고민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 외에 내가 생각하는 건 어떻게 하면 환자분들이 좀 더 편안해 하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방 두 개를 사용하게 되면 거동이 불편한 환자 분들이 진료 전에 진료실에 미리 들어와 계시다가 진료가 끝나면 편하게 나갈 수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드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놓인다. 진료실 안에서 마치 내 방 인 양 편하게 앉아 있다가 허겁지겁 들어오시는 환자 분들을 맞이하고 또 급하게 서둘러 내보내는 모습은 마음이 편치 않다.

이것 외에도 내가 방을 찾아가게 되면 스스로의 마음가짐도 조금 달라진다.
한방에 주인처럼 앉아서 엉거주춤 낯설어하며 들어오는 환자분들의 방문을 맞이하는 마음에서 건너편 방에 기다리고 계시는 환자분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이제 낯설음은 찾아가는 나의 몫이 되는 것이다.

진료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외래 진료실 문을 열고 수줍게 들어오는 환자에게 서둘러 이름부터 물어본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낯설게 들어와서 익숙해지기도 전에 총알처럼 건네는 생뚱맞은 첫인사로 시작해서 각종 어색한 질문들, 연이어 의학 용어들로 만들어진 쉽지 않은 온갖 검사들에 대한 설명들과 물리치료, 운동에 대한 처방들을 쏟아내고 난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실천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 온갖 생활 조언들까지 들려주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환자에게 빨리 나가서 설명 들으시라는 말과 함께 후다닥 등 떠밀어 내보내고 마무리하기가 일쑤다.

하지만 바로 앞 환자의 조금 길어진 진료를 마치고, 옆 진료실로 들어가니 조금 다른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돋보기를 쓰고 조용히 책을 읽고 계시는 중년의 아주머니, 가방에 채워온 실과 바늘을 꺼내서 수세미를 뜨고 계시는 할머니, 가끔 병원 오니 운동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혼자 열심히 스트레칭 운동을 하고 있는 아저씨, 함께 온 보호자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할아버지 등 각자 나름의 색깔과 향기로 잠시나마 기다리는 진료실을 자신만의 익숙한 공간으로 만든 곳에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남의 집에 찾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상세계에서 삶을 경험하며 조금 더 건강히 회복할 수 있는 몇가지 팁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 환자 집을 방문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들을 수 있는 귀와, 세심한 안목, 몇 가지 전략을 왕진 가방에 챙겨 넣고 환자분과 어떤 만남을 경험하게 될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게 된다.

훌륭한 의사로서 나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의 상태를 명확히 보고, 직관적으로 판단하여 현재 가지고 있는 의료를 잘 적용시키기 위한 무장된 자세를 갖추고 싶었다.

실제 세계에서 환자가 경험한 체험을 그대로 드러내어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환자가 생활하는 세계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병원에서의 만남들로 만들어 내는 의료 세계가 과연 환자가 경험하는 실제 세계와 얼마나 같을 것인가? 두 세계는 과연 어떻게 이어져서 환자의 삶을 연결할 것인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낯설음을 경험하는 환자에게 조금이나마 익숙하게 만들어주는 환대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환자의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환대를 가졌으면 소망해본다. 오래전 연구실 앞 방문에 붙여두었던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시구절 처럼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마음의 갈피를 더듬어볼 수 있는 바람같은 환대를, 에마튀엘 레비나스가 그렇게 강조했던 호소하는 '얼굴' 그대로, 말을 거는 타자의 모습 그대로를 환대할 수만 있다면 꿈꿔보곤 했다.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아무리 잘 꾸며 놓은 호텔 같은 병원에 가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이다. 
불편한 남의 집에 찾아와 어색하게 잠시 머물다 가는 환자들에게 낯선 인사 한 두 마디를 건네고는 맞지도 않은 옷을 재단하듯 어색한 조언 한 두 마디로 보내려하는 주인의 안이함을 버려야할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 왕진가방을 들고 환자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지는 못하더라도, 그분의 일상생활을 상상하며, 경험의 흔적들을 알뜰히 살피러 찾아가는 방문객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성함이?"라는 질문으로 건네는 짧은 시간 후,
"한 번 놀러오세요…"라고 웃으며 손 흔들고 나가는 환자의 초대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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