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봉사는 삶의 소명
의료봉사는 삶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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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2.1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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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 원장(전북 전주·김임신경정신과의원)
의사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소명으로 여기며 평생 의료봉사 활동을 해온 이가 있다.
 
김임 원장(전북 전주·김임신경정신과의원)이 바로 그 주인공. 1964년 전남의대 의예과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지금까지 54년, 대한민국 의료봉사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주 김임신경정신과의원에서 만난 김임 원장이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지나온 삶에 대해 들려줬다.

"의예과와 본과 1학년까지는 햇병아리에 불과해 진료실 봉사는 어림도 없었죠. 진료실 뒤켠에서 환자들의 대변을 수집해서 현미경으로 기생충 알을 검사하는 게 주요 보직이었지. 하하. 검사결과를 보고하면 내과의사가 투약 치료하고요. 그랬던 것이 본과 1학년 병리학 조직검사 땡시험 때 진가를 발휘하더군요. 의대 생활 땐 링거나 영양주사도 잘 놓는 학생으로 소문났죠."

김임 원장은 1964년부터 의대 간호대 연합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무의촌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1968년 4학년 여름방학 때였을까. 전주 모악산 앞자락 마을에서 60대 촌장이 고함을 치며 진료를 거부하고 진입로를 막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유교적 신념 때문이었다. 한 시간 여 대화 끝에, 결국 남녀 진료실을 구분해 어렵사리 진료했다. 그야말로 옛날이야기다.

김 원장은 세브란스병원 인턴이던 1969년 여름방학 때 운좋게 연세대 간호대 봉사팀과 함께 거제도 장목면 의료봉사대에 참여했다. 이후 바로 이화여대 '다락방' 의료봉사팀 총무였던 서용원 호서대학교 명예교수와 만나게 됐고, 이십여 년 넘게 봉사활동을 함께 했다.

오랜 시간 김 원장을 지켜봐온 서용원 명예교수는 그에 대해 "더없이 순수한 영혼으로, 인간성 회복을 위해 한결같이 노력해온 열정적인 사람"이라며 온화한 성품을 지녔지만 날카롭고 섬세하게 진료를 잘했다고 회상했다. 그 덕분인지 김 원장에게는 같은 약을 처방받아도 그 효과가 너무 좋다며, 의료봉사 기간 내내 혹은 의료봉사 활동이 끝나고도 다시 찾는 환자들이 꽤 많았다고.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늘 웃는 낯으로 달려와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도 전했다.

김 원장의 초기 의료봉사 활동은 기생충 박멸 사업부터 레크리에이션 보급, 화장실 개량과 손씻기 운동 등의 감염 예방사업까지 위생과 예방에 초점을 맞췄다. 1972년부터 2016년까지 40년 넘게 '장미회'에 몸담아 간질 환자를 무료 진료하기도 했다.

1985년 이후엔 성폭력 피해자, 학교 폭력 피해자, 가정 폭력 피해자 등 개인과 가족의 정신건강 치료를 위해 힘썼다. 다양한 언론 매체와 글, 방송을 통해 정신건강 강좌, 호스피스 교육, 자살 예방 사업 등의 예방사업을 펼치고 병원·학교·사회단체를 오가며 자살 예방, 스트레스 관리, 청소년 자녀와의 소통 문제, 위기관리 등 정신강좌 강의도 진행했다.

지역YWCA와 합동해 학교 주변 유해환경 감시위원으로, 경찰과 연합해 선미촌 방문 상담의로, 정신건강의학과 이메일 상담의로, 교도소 진료 및 자살 예방활동이나 교육 강사로 바삐 지냈다. 또 전주 생명의 전화 이사장이자, 자살예방상담 및 수퍼바이저 1급 강사, 전화상담 봉사자의 동아리 지도교수, 20년 이상 교육위원장 및 수퍼바이저로 활동하는 등 1인 다역을 소화했다.

오지·무의촌 찾아 다니며 의료봉사

제3국 가난한 나라 사람들 향해 발길

비교적 최근인 10년 전부터는 전주 가정법률상담소 및 가정폭력상담소 지원, '나, 너, 그리고 우리가 행복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정폭력 상담의로서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위한 주요 집단치료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의료봉사 역사와 함께하다

김 원장은 특별히 의료봉사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평생 의료봉사 활동을 해오다보니, 그의 의료봉사 활동은 대한민국의 시대발전에 따른 의료봉사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는 한반도의 이남인 전국 5개도의 오지, 또는 깊은 내륙 시골마을·무의촌·섬 등을 방문해 진료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전기가 없어 호롱불이나 촛불을 사용했던 기억이 나네요. 1970년대 후반 들어 전구로 불을 밝혔고, 동네 우체국이나 면사무소에서 손으로 작동기를 돌려 교환을 통해 전화 통화가 가능해졌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는 형광등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어지간한 동네에 라디오나 흑백 TV가 보급됐지요. 1990년대 산지나 무의촌·오지에 도로가 생기면서 무의촌 진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배편도 늘어나고 병원선 순회 진료도 시작돼 섬들을 위한 무의촌 진료의 필요성도 적어졌고요."

이후 산골이나 오지에 보건지소가 들어서면서 1995년경부터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김 원장은 해외진료봉사대, 종교단체, 병원주관 의사단체 등과 함께 최근까지 러시아 모스독·태국 치앙마이·캄보디아·몽골·필리핀 타클로반 수해지역·스리랑카·네팔 등을 다녀왔다. 옛날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기생충 박멸 운동, 화장실 개량 사업, 우물 파주기 사업, 정수기 사용 및 손씻기, 음식 위생 등의 감염예방 사업과 선진의료 전파에 힘썼다.

아프리카·태국·일본·미국·스리랑카 등 해외에서 약물 중독·자살·에이즈 예방 등 정신건강을 위한 강좌도 진행했다. 김 원장은 이 모든 활동이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 정영숙 명예교수(전북대학교 간호대)가 적극적으로 지지해줘서 가능했다며 특별히 고마움을 전했다.

'가난이 큰 스승'이었다는 김임 선생. 가난한 나라의 환자들을 위해 의료봉사활동 영역을 더 넓혔다. 

건강한 정신, 따뜻한 사회를 위한 노력

"어려서부터 가난은 나의 큰 스승이었지요."
김 원장의 조부 김재숙 선생이 광복장을 수상한 독립운동가였던 까닭에, 집안의 가난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중학교 입시제가 있던 그 시절,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담임이었던 양회대 선생의 소개로 동갑내기 재수생이었던 초등학교 6학년 친구를 가르치는 입주제 가정교사가 됐다. 고교 때와 의예과를 거쳐 본과 2학년 때까지 입주제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를 병행했다. 지금껏 가난한 학생들을 발굴해 장학금을 전달해온 이유도 가난했기에 가난한 이들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서다.

김 원장은 지역사회에서 처지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일장신대학교에 10년 동안 매년 3000만 원씩 총 3억원을 후원했다.

당시 총장으로 인연을 맺은 서울산정현교회 오덕호 목사는 "아시아태평양 국제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인 어려운 처지의 외국인 학생들이나 신학부·사회복지학부 학생들을 수시로 후원했고 전북대학교와 전주예수 병원에도 다양한 후원 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호스피스협회장·한국 생명의 전화 자살예방위원장·대한호스피스완화의학회 전북지부 이사·한국호스피스협회 평생이사 등을 역임하며 전북 지역 사회 봉사활동 단체를 활성화시켰을 뿐 아니라 다양한 네트워크와 리더십으로 모든 일을 순리대로 이끌어준 탁월한 리더"로 기억했다.

"지치고 힘들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위대한 신의 한 작은 도구로 쓰임 받아 활동해온 것이 이제 와서 보면 매우 감사하고 기쁜 추억입니다."

김 원장은 74년을 살면서 의사로서 의료봉사 활동을 해올 수 있었던 것에 그저 감사할 뿐 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그리고 힘이 닿는 한 이런 선하고 좋은 일을 지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 덤으로 사는 인생, 정신적 및 영적 위기의 시대에 어두운 곳, 상한 영혼을 가진 분들을 위해 이 생명 다하도록 따뜻한 마음의 불꽃을 피우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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