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4·13 호헌, 그리고 대한의사협회
영화 '1987', 4·13 호헌, 그리고 대한의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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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2.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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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현 대한의사협회 고문 / 경상남도의사회 명예회장

영화 '1987' 관람자 수가 67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언론과 방송이 뜨거운 열기로 그때의 역사를 연일 재조명하고 있다. '1987'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와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에 의한 사망으로 일어난 민주화 투쟁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09호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987년 4월 17 ~ 18일(일) 제39차 대한의학협회(※의협 명칭은 1995년 '대한의사협회'로 개칭) 정기총회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 봐야 할 기회가 왔다. 그때 참석했던 대의원은 당시 총회를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날의 대의원 265명 중 절반 넘게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1987년 7월 이전은 군사독재 정권타도를 위한 민주화 투쟁운동이 활발했던 격동의 시기이다. 의학협회 제39차 정기총회에서 '4.13 호헌반대'는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 후 6일 만에 일어난 극적인 사건이다.

ⓒ의협신문
손재현 경상남도의사회 명예회장

'4.13호헌 특별선언'은 야당과 재야 세력을 중심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중요 핵으로 하는 개헌논의 확산을 중단시킬 목적으로 1987년 4월 13일 현행 헌법 유지를 선언한 조치이다.

민주정의당(민정당·여당)과 신한민주당(신민당·야당)이 헌법안을 합의하여 만들면 개헌할 용의가 있지만, 야당의 억지로 합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간선제인 현행헌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중요 내용이다.

운명의 날, 4월 18일(일) 오전 10시에 제39차 의학협회 정기총회는 17일 오후 1시에 개회해서 분과토의를 마친 후 다음날 오전 10시에 조선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총회가 속개되고 오후 1시 30분경 총회를 마무리 하는 순서에 들어갔다.

"모든 토의를 종결하고 마지막으로 이미 각 대의원에게 배부된 4.13 호헌특별선언에 대한 지지성명안을 상정합니다"라고 의장이 말한다. 성명서는 '대한의학협회는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특별선언을 적극 지지한다'로 간략하다. 순간 회의장 안에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의장이 "반대의견이 없으면 호헌선언을 지지하는 것으로 결의합니다"하고 의사봉을 내리칠 순간, 필자는 손을 들어 발언권을 신청했다. 반대 의견임을 감지한 한 대의원은 '마이크 앞으로 나가서 발언하라'고 소리친다. 모두가 확실히 들을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다. 

 

'호헌조치 지지 선언 반대' 발언 뒤 쏟아진 박수
의협은 독재정권 심장에 비수 꽂은 최초의 단체

"경남대의원 손재현입니다. 대한의학협회는 의학이라는 학문을 탐구하는 순수한 단체이며, 국민보건과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단체로서 정치와는 거리가 먼 단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정치적 성명을 내면 의학에 대한 순수성을 잃고 정치 권력에 이용되는 우(愚)를 범하는 전례가 됩니다."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터질 듯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내면으로 쌓인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누적된 반감이 일시에 표출된 순간이다. 그 말속에 독재정권을 향한 비수가 스며있는 줄 그때는 몰랐다. 의장은 "제39차 총회를 폐회 합니다"고 선언하고 사라졌다. 의협이 시체가 되기 바로 직전에 되살아났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훈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되짚어보자. 만약 의협이 4.13 호헌선언을 지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의협은 영원히 국민의 뇌리에 어용단체로 낙인찍히고, 50여 일 뒤 일어난 6.10 민주화 투쟁 가두시위에서 의료기관의 창문은 흥분한 군중들로부터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후배들에게 '역적단체'라는 지워지지 않는 멍에를 걸머지게 하는 것이다. 의협은 회원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자멸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결과를 자초(自招)했을 것이다.

회의장에서 나올 때 부산 선배 대의원이 허리를 찌르면서 죽는소리로 말했다. "손 선생, 왜 앞장서나! 큰일 났다! 당신은 이제 죽었다"고 말하면서 뒤쪽에 서 있는 사람들(신문기자와 기관 요원 등 30명 정도)을 가리키면서 경찰청 정보요원,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국정원)와 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현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요원 등 권력기관의 저승사자라 했다. 군사정권과의 위험한 충돌은 피 튀고 살 찢기는 신체 고문을 각오해야 하므로 그 선배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곧바로 저승사자가 다가왔다. 그는 사회단체를 담당하고 있는 안기부 책임자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함께 가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의협신문
1987년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 직후 열린 대한의사협회 제39차 정기총회 모습. ⓒ의협신문

의협의 4.13 선언에 대한 지지성명을 시작으로 사회 모든 단체가 스스로 지지성명을 발표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정부계획이 첫 출발부터 무산된 데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언론에 대서특필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신문 기자를 많이 끌고 왔는데 망신만 당했다고도 했다. 또 흥분한 목소리로 당신 때문에 내가 죽게 되었다고 한마디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누가 언제 끌고 갈지 몰라 두렵고, 특히 소문난 남영동으로 끌려갈까 봐 겁났다.

어쨌든 점심은 먹고 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오찬장으로 갔다. 경남중앙대의원 고 김지영(마산), 고 김하수(마산), 고 김윤양(진주), 고 김창수(진주), 고 조경환(울산), 고 김하수(마산), 고 우동하(진해), 고 김병일(마산), 한시준(울산)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몽둥이찜질이든 물고문이든 배를 채워야 힘을 내고 버틸 수 있겠다 싶어 양껏 먹었다. 식사 후 경남의사회 고 김지영 회장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어디로 잡혀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가족에게 알려줄 목격자가 필요했다. 마산 도착 그다음 날부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곳곳에서 격려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안기부의 협조 전화도 걸려왔다. 협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다. 제발 입 닫고 조용히 앉아 있으라는 뜻이다.

강력한 언론 통제로 신문에 '4.18 의협의 호헌반대 성명'에 관한 기사는 한 줄도 보도된 바가 없다. 그런데도 마산의 중소기업체의 노조 간부의 전언은 나에게 큰 보람과 위안을 주었다. 야당과 재야 민주화운동세력 또 각계각층의 크고 작은 투쟁단체에 곧바로 의협의 '호헌 반대'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4.18 의협의 호헌 반대는 곧바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투쟁세력에 큰 힘을 보태는 자극제가 되었다고 했다. 군사독재 권력이 글은 막을 수 있어도 말은 막지 못했다.

30년 지난 지금 의협회장께 건의한다. 1987년 제39차 의협 정기총회 회의록에서 실종된 역사적 진실을 정확히 복원하여 수록하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올해 총회에서는 군사 권력에 의해 일어났던 4.18호헌반대성명에 대한 진실을 보고하고 공식적으로 모든 사실을 바로 잡아 주기 바란다. 문민정부 30년 동안 무관심으로 까맣게 잊혔던 의협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반드시 되살려야 한다. 의협의 4.18 호헌반대 뉴스가 물밑으로 흘러 위로는 야당과 재야 호헌 반대 단체로 퍼져나가고 아래로는 지방 중소 투쟁단체로 퍼져 나가 그들에게 투쟁의식을 고취하는 불씨가 되었음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그해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 민주화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체로 대규모 거리집회가 일어난다. 곧이어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 특별선언을 발표한다. 드디어 군사독재 정권의 막이 내린다. 유명을 달리한 1987년도 중앙대의원 여러분의 명복을 빌면서 영화 '1987'을 계기로 독재정권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최초의 단체'임을 자랑스럽게 보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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