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병원에서 보내온 새해 달력
이사장 사모님의 거미줄 사진들로 꾸며져 있다
접사된 거미줄에는
새벽이슬, 햇빛, 풀씨, 꽃잎, 낙엽, 빗방울,
안개와 함께
지나가는 바람이 걸려있다
모두 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출렁이는 거미줄에서
반짝 이슬방울 떨어진다

<의협신문> 청진기 칼럼을 연재하며 쫓기듯 보낸 한 해가 달력 한 장 만을 남기고 있다. 곧 작은 짐을 벗게 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돌아보면 그저 아쉽기만한 한 해였다. 그동안 극히 사적인 글을 마다하지 않고 실어준 <의협신문>과 읽어준 회원 독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마지막 원고는 달력에 관한 시를 골라 사연을 보탰다.

연말이 되니 제약사·보험회사·대형병원·건축회사·동창회 등 여기저기에서 새해 달력을 보내온다. 달력을 넘겨보면 명화로 장식된 것도 있고, 사진 작품으로 만든 것도 있고, 자사의 역량을 홍보할 수 있는 자료를 넣은 것도 있다. 모교 동창회 달력의 경우에는 모교에 대한 자부심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사진들로 꾸미기도 한다.

친구가 운영하는 IT 회사의 작년 달력은 직원들의 여행사진 사내 공모전 수상작품들로 꾸며 창의적 발상이 돋보였고, 머리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사가 뭔가 다르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인가 같은 지역에 있는 대형병원에서 보내온 달력은 그 병원 이사장 부인의 거미줄 사진 작품들을 담아 신선했다. 병원장의 모친인 그분은 개인전도 여러번 연 경력이 있고 지금도 활동 중인 중견 사진작가다.

거미줄 사진은 ○○병원이라는 지역 거점병원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연계돼 있는 개인의원들 간의 의료전달체계적 네트워크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거미줄의 주인은 거미이고, 거미줄의 목적은 먹이를 잡은데 있을 텐데, 사진 어디에도 거미는 보이지 않았고 먹이가 걸려있는 사진도 없었다.

다만 꽃잎과 이슬방울과 안개와 반짝이는 햇살과 낙엽이 걸려있는 아름다운 거미줄 사진들 뿐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여백으로 바람도 지나가는 듯 했고, 바람결을 따라 숲속의 나무와 들풀의 향기도 전해오는 듯 느껴졌다.

지역사회 개원 의사들이 형성한 네트워크 거미줄에는 무엇이 걸려야 할까. 이웃들의 건강을 돌보는 헌신,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의 피어나는 미소, 완치를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 의료진에 대한 감사의 마음, 이런 영롱한 것들이 아닐까.

사진작가님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으셨겠지만, 달력을 기획한 분들이 그 사진을 채택한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런 기획 의도가 있었다면, 의사들은 먹을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롱한 것을 원한다는 매우 이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미가 되겠지만, 생명을 가진 동물이라면 당연히 먹이를 먹어야 할텐데, 거미줄 사진 속에 안 보이는 거미는 어디에 있으며 무얼 먹고 살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든 것은, 우리 의료계의 미래는 괜찮을까 하는 무의식적인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라 짐작된다.

새해에도 의료계의 사정은 어두워만 보인다. 환자를 치료하며 보람을 느끼는 것도 좋고, 지역사회의 건강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의사로서 아름다운 모습이겠지만, 국민 건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사들로 하여금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위정자들은 왜 안하는 것일까.

그들의 거미줄에 걸릴 유권자들의 표와 평가와 대중적 인기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