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린 원장(서울 서초·아름다운피부과의원)

그날따라 그 아이의 얼굴이 어두워보였다. 집을 떠나서 서울에 올라온 지 2년 정도 되는 대학생 조카에게 한 달에 한 두번 따뜻한 집밥을 챙겨주기는 것은 나의 중요한 스케줄이자 기쁨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카는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핸드폰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밥맛이 없니?"

나는 걱정을 감추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물을 닦으며 급히 욕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모처럼 모인 가족들, 사촌 형제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세면대에서 조용히 울고 있는 조카의 등을 쓸어주며 되지도 않는 위로를 했다. 아이로만 생각했던 조카가 사귄 지 얼마 안 되는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로 했다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유학갈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때 이른 이별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늘 불평도 없고 착하고 내성적인 조카가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나는 고모이기 이전에 한 청년의 순수한 마음을 엿보는 타인이 되어 그의 슬픔에 어느덧 동참하고 있었다. '사랑 때문에 나는 저렇게 울어 본 적이 있었던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었나? 아니, 나 때문에 울었던 남자는 과연 있었을까?' 내 머리 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덧 그런 사랑에서 멀어진 내 모습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내게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중학교 일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셨다. 큰 키에 눈이 부리부리했던 총각 담임선생님을 나는 무작정 좋아했다. 버스비를 아껴서 걸어 다니고, 간식 사 먹을 돈까지 모아서 아침 일찍 선생님 책상 위에 꽃을 꽂아 놓곤 했다. 선생님을 만나면 떨려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정성들여 편지를 썼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느새 여주인공이 되어 선생님과 사랑에 빠져 있었고 팝송을 들으면서 내가 선생님께 바치는 사랑 노래라는 상상을 했다.

한번은 선생님께서 자율학습 감독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연락도 없이 집에 갑자기 늦게 들어갔다가 엄마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아슬아슬하게 몇 년간 혼자서 이어졌다.

수년 전, 절친했던 중학교 동창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들의 모임에 그 선생님을 초대했는데 참석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많이 늙으셨을 선생님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옛 추억이 깨지는 게 나는 싫었다. 그저 순수했던 날의 첫사랑으로 그 선생님을 간직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나를 놀리곤 한다. "하린아, 중학교 때 너의 대화는 그 선생님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선생님 이야기로 끝났어. 그리고 그 이야기 할 때는 얼굴에서 빛이 났었어!"

하지만 나는 그 뒤로 뜨거운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어린 나이에 싱겁게 결혼을 해서 내 연애사에기대가 컸던 친구들을 실망시켰다.

식사가 마무리 되고 조카의 심경을 눈치 챈 남편이 혼잣말을 했다.
"그런 눈물도 흘려 봐야지 진정한 사랑을 알고 세상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거야. 그 녀석, 이제 제법 많이 컸네."

그런데 그 말이 나에게는 왠지 본인의 옛 경험을 떠올리는 말처럼 들렸다. 본인에게도 과연 그런 추억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사실 확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남편에게도 비오는 날 문득 생각나는 여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옛 기억은 모두 까마득하게 잊고 오직 나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지도 모른다. 어찌 그의 추억까지 간섭할 수 있으랴.

고백하건데 나는 사랑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단지 사랑을 잃은 스스로를 위해 울었던 적이 있을 뿐이다. 아프더라도 떨리는 마음으로 두 팔 벌려 사랑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꿈꾸던 모습이 아니어서 뜨겁지 못했노라고 변명하고 싶다. 아니, 사실 나는 용기가 없었고 상처받기도 싫었고 사랑 대신에 잃어야 할 것들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불타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은 아니며 가랑비 같은 사랑, 온돌 같은 사랑도 사랑이라고 자위해본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고 그 모양과 빛깔도 다양할 테니까.

이 계절에 누군가를 떠올리며 가슴을 적시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그 마음이 그대들의 삶을 힘차게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를, 넘치고 흘러서 주변의 대지를 비옥하게 하는 빗물이 되기를. 아름답고 순수한 청년, 내 조카의 아픔도 그렇게 좋은 씨앗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