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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다큐멘터리 사진들
청진기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다큐멘터리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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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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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형 교수(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공공보건의료사업단)
▲ 김계형 교수(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공공보건의료사업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은 예술사진에 대해 거의 모르는 사람들도 단번에 삶의 질곡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육중한 메시지를 던진다.

세바스티앙 살가도는 라틴 아메리카의 노동자들·에티오피아 난민·르완다 난민·브라질의 금광노동자 등 빈곤과 기아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필름에 담아왔던 20세기의 대표적인 사진작가이다. 그의 사진은 강렬한 원근법을 사용한 사진이 다수이며, 또 강한 대비의 흑백 인화를 통해 시선을 끈다.

거친 평원 위에 긴 넝마를 걸치고 걸어오는 가족, 가장 앞장선 아이는 뺨이 앙상하게 야위어 있으며 가족들의 눈매는 깊고도 선명하다(제목: Korem camp. Ethiopia. 1984). 이 사진은 결코 어둡거나 비참하지 않으며 모순되게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당시 세바스티앙 살가도는 국경없는 의사회와 15개월 동안 같이 협력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는데, 클리닉에 방문한 환자들의 사진도 다수 촬영했다.

모래폭풍과 안질환으로 실명한 난민(Refugee, blinded by sandstorms and eye infections. Mali. 1985), 영양실조와 탈수를 겪고 있지만 마치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노파(A malnourished, dehydrated woman in the hospital in Gourma Rharous. Mali. 1985),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가는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제목: A refugee from Eritrea, carrying his dying son, arrives at Wad Sherifai camp. Sudan. 1985).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하며 기품이 있다.

그의 사진은 극한 상황에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는 휴머니티에 관한 기록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다.

1986년에는 브라질의 세라 펠라다 금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에 대한 작품인 'workers' 연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Serra Pelada gold mine, Brazil, 1986). 마치 고대의 노예처럼 천조각만을 걸치고 황금이 있는 광산에서 일하는 수만명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사진을 보게 되면, 이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값비싼 황금을 채굴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피사체의 비극을 강조한 다른 사진작가들과는 달리, 세바스티앙 살가도는 피사체의 눈높이에서 작업을 해왔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의 사진을 보면 빈곤한 삶의 소중함을 반영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는 피사체의 약점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 그는 피사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진을 찍었다. 'Workers'시리즈 또한 7년간 작업한 결과라고 한다.

살가도는 "글쓰는 작가가 되려면 집에서 작업을 해도 되지만 사진작가가 되려면 문밖으로 나가야 된다"라고 했으며, "아프리카 사진을 정말 잘 찍으려면 아프리카를 공부한 뒤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성장 배경이 된 브라질은 70년대에 빈곤과 경제 파탄, 이로 인한 군부 정치를 겪었으며 가난과 범죄가 뒤섞인 곳이었다.

그래서 그가 아프리카나 세계 각국의 난민들이나 노동자들을 보다 가까운 눈높이에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살가도는 농장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경제학을 전공했고 파리에서 농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당시 개발원조에 있어서 농업기술 전수가 각광받던 시기였으며, 많은 농경제학자들이 농업이 개발도상국에 경제 활성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한국에도 농업원조 위주로 지원해야 된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있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또한 World bank의 아프리카 커피 농업에 대한 프로젝트를 맡았다.

그러나 그 당시 선진국의 원조가 식민지 정책 또는 수원국의 경제 속국화를 가속시킨다는 여러 논란이 있었는데, 살가도 또한 아프리카에서 작업을 하면서 이를 깨달았다고 한다. 살가도는 현실을 담은 사진 한 장이 경제학보다 현실을 가감없이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이 흔히 마시는 커피가 빈곤한 커피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남기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농업 경제학을 버리고 나이 30세에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자신이 예술가가 아닌 역사가라고 생각했으며("I'm not an artist. An artist makes an object. Me, it's not an object, I work in history, I'm a storyteller." Sebastiao Salgado) 사진촬영이 농경제학 보고서보다 10배는 흥미롭다고 느꼈다.

사진 활동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점차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그가 르완다에서 90년대를 보냈을 때, 매일 수천 명의 잔혹한 죽음을 목도했다고 한다. 그가 의사로부터 받은 검사에는 큰 이상이 없었지만,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느꼈으며,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인류애에 가득 찬 그였지만, 인류가 살아남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했다. 결국 그는 그 이후 아마존 밀림 보존을 위한 환경사진가로 전향하게 된다.

그는 총 120개국에서 사진작업을 했으며, 8개의 주제에 대해 각각 3∼7년가량 작업했다. 일흔이 넘은 현재에도 활발히 작업을 하고 있다.

비곤·기아·질병·범죄가 넘치는 곳의 지역 사람들과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그들을 기록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 영향을 받은 많은 활동가, 의사들이 구호 활동을 시작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누군가와 사진의 톤이나 색조를 토론하기보다는, 내 사진에 정보를 제공하고, 논쟁을 하고, 모금을 하길 원한다"라고 그가 말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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