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아픈 건 참아도
가려운 건 못 참겠다고
중이염 환자가 말했을 때
세상에 못 참을 아픔은 없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소함이 삶을 더 성가시게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세상에서
복사꽃이 붉게 피고
은행잎이 누렇게 물들어가는 동안
귓속 깊은 곳에
샘물이 솟고
이끼가 자라고
앉은뱅이 꽃이 피기 시작했다
참을 수는 있었지만
막을 수는 없었던
비밀의 화원이 생겨났다
나는 그의 귓속을 엿보면서
그의 말이 큰 울림을 가지게 된 것이
비밀의 화원 때문이라 생각했다

환자들이 클리닉에 와서 무심코 하는 말들 중에 오래 여운이 남는 말들이 있다. 진료에 대한 불평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떤 때에는 질병과 연관된 이야기라기보다는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뜻을 담고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몇 년 전 할머니 중이염 환자께서 귀가 너무 가렵다고 하소연하며 하신 말이 그런 경우였다.

그 할머니는 중이염을 오래 앓아 고막 가운데에 큰 구멍이 나 있었고, 농이 흐르다 멎었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이차적으로 곰팡이 염증이 생겨 매우 가려워하셨다. 아픈 것은 참겠는데 가려운 것은 정말 참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며, 귓속을 박박 긁어냈으면 좋겠다고 하실 정도였다.

중이염에 곰팡이 염증이 동반된 환자의 귓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곰팡이는 현미경 확대 시야에서 흰색 파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검은색 혹은 회색의 앉은뱅이 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할미꽃이나 에델바이스의 꽃잎처럼 잔털이 촘촘히 나 있는, 이슬 맺힌 부드러운 융단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고막천공에서 박동성 이루가 나오는 모양도 작은 연못에서 용출되는 샘물처럼 보여 조경이 잘 된 화원의 미니어처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현미경으로 귓속을 관찰하는 이비인후과 의사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비밀의 화원인 셈이다. 마치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종유동처럼,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 형성됐는지 모르는 비밀의 화원이 생겨난 것이다.

첫 시집을 내고 평론가로부터 평론을 받았을 때, 수록된 시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시라고 평가받았던 것이 바로 이시였다. 그 이유인 즉 이비인후과 의사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쓸 수 있었던 시라는 것이었다. 문학이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직접적인 경험이 근본을 이루고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료의 현장이 감동과 서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대부분의 진료 시간은 긴장의 연속이면서도, 똑같은 불평을 들어주어야하는 지루함의 현장이다. 환자는 괴롭고 회복에 대한 마음은 간절해 마음은 급한데, 의사가 제공하는 치료의 효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아 의혹과 불신의 시선을 주고받는 우울한 현장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아주 가끔은 위로와 감사의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여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연못의 진흙 속에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과 같은 감동을 맞보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할머니 중이염 환자의 귓속에 생긴 비밀의 화원도, 아픔과 가려움과 불편함을 참으며 오랜 시간을 견뎌온 결과 생겨난 것이며, 비록 정상적인 구조가 파괴되고 기능이 손상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런 비밀스러운 화원의 주인이 됨으로써 말 한 마디가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커다란 울림으로 들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환자의 하소연이 아니라 비밀의 화원의 주인 목소리로 성찰의 말씀을 나누어 주신 것이다. 가치 있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려야 만들어지는 것이고, 깨달음은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