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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테헤란로
청진기 테헤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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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1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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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 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길고도 넓은 길이 보인다. 저기 멀리 언덕이 아스라하다. 신기루 같은 아지랑이 위로 흐릿한 빛줄기가 부서져 내린다. 양 옆으로 도열한 마천루는 거대한 주상절리처럼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았다. 그들이 만든 커다란 회색의 사각 그림자가 아스팔트 위에 스산하게 드리운다. 웅장하게 펼쳐진 빌딩 숲에 비해 아기자기한 가로수는 장난감처럼 왜소하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아련하고 운치 있는 풍경이지만 강남역을 넘어 큰길에 들어서면 빽빽이 들어선 차와 행인들로 인해 정신이 현란해진다. 거대한 광고판과 간판, 큰 건물들이 나를 압도한다. 나와 자동차 그리고 아들, 이 세 존재는 오늘도 이 테헤란로 위를 차의 물결과 더불어 흘러가고 있다.

'테헤란로'라는 이름은 1977년 서울시와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의 자매결연을 기념해 붙인데서 유래했다 한다. 강남대로에서 선정릉 공원을 거쳐 송파구 잠실동의 삼성교에 이르는 거리로 폭 50m, 길이 4km의 10차선 이상 도로라 하니 가히 '태(太)헤란로'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푸른 들녘의 길이나 강둑, 아담한 고샅길을 지나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에 도시생활을 했지만 집 앞은 좁다란 시골길이었을 뿐이다. 그런 내가 어쩌다 이 도심의 대로를 집 앞 골목처럼 누비며 살게 됐을까. 그건 순전히 아들 때문이다.

집에서 나와 강남·역삼·선릉역을 지나 포스코빌딩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대치동에 이르게 되는데 길가와 골목마다 학원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거기 있노라면 '사교육을 축소하고 공교육 위주의 교육환경을 만들겠다'는 관가의 호언이 이뤄질 날은 사뭇 요원해 보인다.

대치동의 학원 몇 군데를 수년 동안 들락거리며 아들을 실어 나르고 데려오곤 했다. 주로 이 테헤란로를 이용해서 말이다.

이 길을 가다 보면 생각에 잠기곤 한다. 먼저 화려한 도심의 현란한 광휘에 매혹된다. 큰 회사 빌딩이나 금융가, 멋진 호텔, 백화점을 보며 세상의 좋은 걸 맘껏 누려보고 싶은 욕심이 불현듯 솟는다. 선릉역을 지날 때면 샹제리제 빌딩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막 상경한 나를 반갑게 맞아주던 그가 건물에서 다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안과 레지던트 시절, 테헤란로 끝에 자리한 삼성동 C호텔의 뷔페식당에서 의사 선배님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연세가 지긋하고 농담도 재미있게 잘하던 선생님 중 몇 분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역삼동의 R호텔 앞을 지날 때면 친지들과 함께 큰아들 돌잔치를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아들은 지금 내 옆에 앉아 말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안과 전공의 1년차 때였다. 당시 나는 밤낮없이 병동과 수술실, 응급실의 환자를 돌보느라 병원을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안과에 갓 입문한 신출내기 의사는 늘 좌충우돌하며 실수와 사고를 안고 살았다.

외래에서, 수술실에서, 혹은 당직실에서 격무에 시달리고 때때로 꾸지람을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늘 긴장의 연속인데다 잠이 부족하니 어지럽고 멍해질 때가 많았다. 차라리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던 것 같다.

조그만 눈에 왜 그리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병의 종류도 많은지. 게다가 현미경으로 눈을 들여다보며 진찰을 해야 하는데 이게 익숙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배들은 '어떤 소견이 보이지?' 하고 묻는데 아무리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눈에 어떤 질환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에 머쓱할 때도 잦았다.

좁은 동공을 통해 병변을 확인하는 일도 몹시 어려웠다. 늘 나만 바보처럼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도 원하던 안과의사가 되어 세상이 내 것 같던 기쁨은 온데간데 없고 하루하루가 처절하고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기를 몇 달 쯤 지났을까.
"정선생! 오늘 입국식인 거 알지?"
한 선배가 말했다.
"오늘이 바로 정선생이 우리 안과 식구가 된 걸 확인하는 날이야. 알겠어? 하하하!"
선배는 호쾌하게 웃었다.
"아, 네"

쑥스러운 듯 대답하는 나 역시 입국식을 기대하며 마음이 들떴다. 아직도 어렵기만 한 선배 전공의들과 하늘같은 전문의 선생님들을 모시고 함께 병원을 나섰다. 몇 달 만에 병원 근처를 벗어난 것이다. 승용차 뒷자리 한편에 앉아 조심스레 손발을 모으고 있었다. 차는 강남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즐거운 대화가 오갔다.

긴장을 풀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조용히 앉아 무심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 많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저리도 바쁘게 오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할 무렵 눈이 휘둥그레지는 큰길에 우리 차가 들어섰다. 바로 이 테헤란로였다.

'역시 서울에서도 강남의 한복판이라 길이 크기도 하고 건물도 엄청나구나. 여기에 비하면 광주의 충장로나 금남로는 참으로 별거 아니잖은가…….'

혼자 상념에 젖어 있는데 차안의 라디오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트로트 가수의 이별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나 곡조가 꽤 구슬프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노래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고향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어 부모님이 보고 싶단 생각이 들더니 갑작스레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순간 뜨거운 눈물이 솟아 흘러 한참을 소리도 내지 못하며 울고 말았다. 옆에 있던 선생님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차창을 보며 눈이 가려운 척, 뭐가 들어가 비비는 양을 했다.

돌이켜보니 고달팠던 전공의 초년시절에 겪은 설움과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구슬픈 노랫가락과 공명이 되어 그렇게 눈물샘을 터뜨리고 말았나 보다. 그래도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흘린 순수한 눈물이기에 후회는 없다. 의사로서 살아가는 일이 힘겹게 느껴질 때면 그날의 눈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돌아올 수 없는 젊은 날의 꿈과 눈물, 차선의 개수만큼이나 다양한 서정이 아로새겨진 길이어서일까. 때론 이 빌딩 숲길이 어떤 고즈넉한 숲속길보다 푸근하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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