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쿵!

뭔가 차에 부딪혔다. 운전하는 모든 이에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이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피자를 나르는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내 차에 부딪혀 있다.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황급히 오토바이를 들어올리며 "죄송합니다" 를 연발한다.

차의 옆면을 보니 살짝 찌그러진 모습의 표면 위에 긁힌 자국이 보였다. 그 옆으로 도미노 피자 상표의 빨강색과 파랑색이 하얀 색 차체에 위 아래로 제법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언뜻 보면 태극마크처럼 보이겠다 싶었다. 전에 아들을 태우러 오던 태권도장 차가 떠올랐다.

"거 참! 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했더니 길이 미끄러워 그랬다며 거듭 죄송하다 한다.
학원에 간 아이를 데려오려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있다가 당한 일이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얼른 사장님한테 전화해서 보험처리 해달라고 해요."

말한 후 시계를 자꾸 쳐다보며 빨리 해결하고 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몇 분 후 아들까지 학원에서 나와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글쎄 이 배달부 청년이 어딘가로 전화를 한 통화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차분한 표정이 되어 "저어,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하는 것 아닌가.

"네, 이건 무조건 제가 잘못했으니 보험에 접수해서 바로 해결해드리겠습니다."

백배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고 '어서 갈 길을 가시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지금 보험사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으니 좀 기다려 주세요."하는데 말투에는 결연함마저 사뭇 느껴졌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가만히 서있는 차를 제가 받아놓고 이제 와서 시시비비라도 가려보자는 거야 뭐야. 아까 죄송하다던 말은 뭐였던 거냐구.'

"아니, 나 지금 바쁜데 꼭 이렇게 해야겠어요?"했지만 그는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이 없었다. 기가 막히긴 했어도 계속 말다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짢은 채로 하릴없이 한참을 기다렸다.

양측의 보험사 직원이 나타났다. 당연히 상대의 과실이 100퍼센트일 거라 자신했고 간단히 마무리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양측 보험사 직원이 서로 긴밀히 대화를 하며 시간을 끌 때부터 일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더니 급기야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내 차가 가입돼 있는 보험사의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선생님이 차를 세우고 계셨던 위치가 합법적인 주·정차구역이 아니어서 우리 측에도 10프로 정도의 과실이 있습니다. 조금 억울하시겠지만 저희도 보험 처리비용을 일부 분담할 수밖에 없습니다."하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 못한 결과에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당황스러워 말문조차 막혔다.

'야! 이거, 모든 일은 결론이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알 수 없고 장담해서도 안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청년 배달부 앞에서 어른이랍시고 위세를 떨며 야단을 치던 일이 후회가 됐다. 다친 곳은 없는 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냉정하게 몰아붙인 것도 미안했다. 무엇보다 내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한동안 이 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일도 나의 판단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껏 알량하고 얕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자신만이 옳고 남은 틀렸다는 오만과 착각에 빠져 살지는 않았나 돌아보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형전편'에서 "무릇 소송에 있어서 급하게 달려와 고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말을 얼른 믿지 말고 늦춰 처리하여 천천히 그 실상을 살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성서의 <잠언>에도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는 말씀이 있다.

진료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다급히 호소하는 증세나 언뜻 보이는 소견만으로 판단을 하기보다는 문진(問診)과 진찰·검사를 통해 얻은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신중히 진단을 내린 후 치료방향을 정해야 한다.

의사 초년생 시절 겪었던 여러 번의 뼈아픈 과오를 통해 체득한 것이다. 이번 사고는 진료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주의와 신중함이 필요함을 간과하며 살아온 건 아닌지 자성하는 계기가 됐다.

일이 정리된 후 부르릉 하는 오토바이 소리를 남기고 그는 떠났다. 비록 약간의 괴로움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얻은 소중한 지혜는, 그가 내 차에 남겨놓은 울긋불긋한 회사의 상표만큼이나 또렷하게 나의 뇌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