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주머니 속에
버리지 못한 휴지
지갑 속에
어머니 사진, 지폐 몇 장
가슴 속에
가벼운 역류성 우울
내가 가지고 다니는
구름을 닮은 것들
지난 십 년, 이십 년
너무 달라진 세상, 긴 세월동안
변함없이 나와 함께 있는 것들
내 생애를 쓰다듬는 긴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을 따라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

주변에 휴지통이 없으면 코나 입을 닦은 휴지를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깜빡 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중에 꺼내보면 구겨진 휴지는 영락없는 뭉게구름의 모습이다. 미리 미리 버리지 못해 주머니에 들어있는 상태로 세탁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휴지는 새털구름처럼 잘게 풀어져 함께 들어있던 모든 빨래에 묻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짐작하시겠지만, 집안의 기상도도 삽시간에 먹구름 혹은 천둥으로 변해 몇 차례 아내의 큰소리를 들어야 한다. 어찌됐든 휴지는 구름의 모습을 보이다가 흩어져 사라지는데, 이런 생각이 이 시의 출발점이 됐다.

지갑 속에 어머니 사진을 넣고 다닌 지도 수 십 년이 되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사진관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눈이 나빠지기 전 안경을 쓰지 않은 소년 시절의 내 모습과, 40대의 젊고 인자하고 고우신 어머니 모습이 들어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 꺼내보면 나도 어머니도 그때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져있다.

나는 근시와 원시가 함께 있는 안경잡이 중늙은이로 변했고, 어머니는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셨다. 구름으로 표현하면 뭉게구름에서 새털구름으로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단계일 것이다.

내 지갑의 사정도 수 십 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아 늘 몇 장의 지폐만 들어있을 뿐이다. 왜 그리도 쉽게 사라지는지 구름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게도 지갑의 사정과 연관이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가벼운 우울감은,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늘 함께 있다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의사의 시라는 티를 조금 내고 싶어 '역류성' 이라는 의학 용어를 차용해 보았다. 우울은 잠잠하다가도 울컥 올라오는 성향이 있고, 주로 가슴께에서 답답해지는 것이 주된 증상이며, 색깔로 표현한다면 구름과 비슷한 회색에 가깝다. 역류성을 잠재우는 겔 타입의 위장약도 제법 구름을 닮았으니 이런 저런 이유로 역류성이라는 의학 용어가 우울을 수식하는 시어로 제대로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지난 십 년, 이십 년 사이에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이제는 졸업식이라고 부모님과 함께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거나, 지갑 속에 인화된 사진을 넣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동영상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늘 손에 들고 다니는 세상이 됐고, 휴대폰 갤러리에 방대한 앨범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으니 사진 한 두 장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석에서 지우고 언제라도 다시 찍어 보관할 수도 있게 된 디지털 세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