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는 것'과 '남는 것'
'남기는 것'과 '남는 것'
  • Doctorsnews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17.09.04 11:4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105세 한 일본인 의사의 삶과 죽음을 보고 -
맹광호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예방의학

맹광호 가톨릭대 명예교수
100세를 넘은 나이에도 환자를 진료하고, 건강과 행복한 삶에 대해 많은 대중강연과 저술활동을 해 오던 일본의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 선생이 지난 7월 18일 향년 105세로 세상을 떠났다. 106세 생일을 3개월 앞둔 때다.

일본 국내 언론은 물론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BBC 방송 등 세계 주요 언론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만큼 그는 일본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100세 현역 의사', '행동하는 의사' 등으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가 명예병원장으로 있던 동경의 세이 로카(聖路加) 국제병원이 주관한 장례식에는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저명인사와 일반인 약 4,000명이 참석해서 그와의 마지막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일본 천황의 부인도 있었다.

특기할 일은 이날 장례식에서 히노하라 선생이 직접 작사 작곡한 <사랑의 노래>를 한국인 테너 가수 배재철 씨가 열창했던 점이다. 유명한 테너로 주로 일본과 유럽무대에서 활동했던 배재철 씨는 2005년에 갑상선 암 진단을 받고 노래도 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인 매니저와 많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암 제거와 함께 성대복원 수술을 받은 일이 있는데, 히노하라 선생 역시 배재철 씨의 열렬한 팬이면서 후원자였다고 한다.

히노하라 선생에게는 그의 이름과 함께 따라붙는 별칭이 많다. 우선 그는 내과 의사였고 의학교육자였으며, 건강증진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일에 앞장 선 예방의학자였고 생명운동가였다. 그는 또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직접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피아노 연주도 했으며, 무엇보다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책을 쓴 대 저술가였다.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출판한《100세 시대를 살아 갈 비결》을 포함해서 그가 쓴 책이 무려 200권을 넘는다.

나는 히노하라 선생을 개인적으로 두 번 만났다. 첫 만남은 그가 94세 이던 2006년 7월 교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본의 옛 도시 나라(奈良)에서다. 그곳 의과대학에서 열린 일본의학교육학회 연차 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아 한국의 의학교육에 관한 발표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일본의학교육학회는 이미 여러해 전부터 히노하라 선생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매년 연차 학술대회에서 '히노하라 특강'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날 강연에서 대학시절 결핵으로 1년 간 휴학까지 해야 했던 경험과 함께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의사는 죽지 않을 만큼 몸이 아파봐야 진정으로 환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한 그의 말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나를 그에게 소개한 일본 교수로부터 내가 한국에서 의학교육은 물론 금연운동과 생명운동 등 여러 민간단체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더욱 더 기뻐했다. 자기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한 특별한 친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30년 연하의 젊은(?) 한국인 교수인 나에게 보여준 그날 그의 자상함과 친절한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특히 내 발표까지 듣고 난 뒤 내게로 다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가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해 왔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놀라움과 감동에 가슴이 뛴다. 그날 저녁 일본 천황 가족 식사모임에 초대를 받았으며 식사 후에는 천황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곧장 도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황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히노하라 선생과의 두 번째 만남은 그가 100세가 되던 2011년 가을 오키나와에서 열린 일본금연과학회 학술대회에서의 일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금연운동을 시작한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에 여러 금연 관련모임에 참석해서 강연을 하곤 했는데, 그 때는 아예 오키나와 시민을 위한 '히노하라 선생 100세 기념강연'이 계획돼 있었다. 역시 한국에서의 금연 활동에 대한 발표를 위해 그 학회에 참석했던 나와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해서도 그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얘기를 나누던 도중에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끝을 흐리던 그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왠지 그냥 인사로 한 말은 아닐 거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나 혼자 해 본다.

히노하라 선생은 적어도 일본 내 모든 의사들의 롤 모델이었으며 국민 행복전도사였다. 의사라면 어떤 의사로 살아야 할지,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등에 대해 히노하라 선생만큼 일본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일본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히노하라 선생이 평소에도 남을 돕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철저하게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놀랍게도 1970년 3월에 일어난 소위 일본 적군파에 의한 항공기 피랍사건이후부터라고 한다.

당시 일본 공산주의 과격단체 적군파가 민간 항공기를 납치하여 평양행을 시도했을 때, 공교롭게 그 비행기에 탑승했던 히노하라 선생도 인질로 붙잡혀 김포공항에 착륙한 뒤 4일 간 비행기 안에서 지내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 이 사건이후 그동안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삶을 반성하고 남은 삶은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기로 결심했다고 술회한 일이 있다.

지난해 초 일본 NHK 방송에 출연하여 사회자가 "본인의 인생이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느낀 것은 언제였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히노하라 선생은 "100세를 넘어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생각이 좀 들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은 평소에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면 그저 '남는 것'인 것 같다"라고 했다. 지난 3월 갑자기 기력이 떨어지고 호흡이 어려워 병원에 입원했던 히노하라 선생은 단 며칠을 병원에 머물고 곧장 집으로 퇴원해서 수액 공급을 받다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삶이 감동적이었듯이 그의 죽음 또한 아름다웠다.

내 서재 책장에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나서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놓여있다.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그의 곁에 서 있는 내 촌스러운 모습이 그때의 특별했던 감동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히노하라 선생의 명복을 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장통금 2017-12-28 18:18:49
친일파십니까?
천황이라니요

그들도 천황이라고는 안하는걸로 압니다

* 기사속 광고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로 본지 편집방침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