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클리닉 바닥에 긴 머리카락
한 올 떨어져 있다
머리에 뿌리내리고 있을 땐
향기로운 샴푸로 감아주고
곱게 빗질해 주며
사랑받던 머리카락이었는데
머리를 돌릴 때마다 찰랑이며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이었는데
라벤더 향 흩날리며 뭇 시선을 사로잡던
젊고 긴 머리카락이었는데
이제는 바닥에서 밟히며
선풍기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더는 못 견디겠다고 손사래 치고 있다

가끔 클리닉 바닥에 긴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선풍기 바람에 너풀거리거나 이리저리 굴러다니기라도 하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이 많은 여자 환자분의 머리카락일 수도 있지만, 잠깐 다녀가는 환자의 머리카락이라기보다는 클리닉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젊은 직원들의 머리카락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되어, 청소 깔끔하게 하라고 주의를 줄까 하다가 직원들 마음을 상하게 해서 득이 될게 뭐있나 하는 생각에 꾹 참았다.

유전자 검사를 할 것도 아니어서 자기 머리카락이 아니라고 발뺌하면 할 말이 없을 수도 있고, 청소는 이틀에 한 번 방문하는 청소 아줌마 소관이므로 괜히 청소아줌마에게로 화풀이성 불똥이 튀어 짜증의 도미노 현상이 발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젊은 여자의 잘 손질된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마음도 같이 흔들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긴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보이거나 때로는 괴기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잘 손질한 상태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는 매력의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여자들도 그것을 아는 까닭에 향기 좋은 샴푸를 사용해 감아주고, 곱게 빗질을 하여 헝클어지지 않도록 정돈을 하고, 한쪽으로 묶어주기도 하고, 두 갈래로 땋아 댕기머리를 만들기도 하고, 쪽을 틀기도 하고, 파마를 하여 웨이브를 주기도 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헤어스타일을 연출한다.

광고나 드라마에서도 젊은 여자 주인공이 둔감한 남자 주인공의 시선을 끄는 매력 발산 필살기로 머리를 젖히며 긴 머리카락을 말갈기처럼 흩날리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이제 그런 건강미와 관능미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일원이 되지 못하고 탈락된 것이다.

잘 관리 받던 귀한 신분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존재가 된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끄는 매력의 원천에서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이다. 원래 내가 이런 천덕꾸러기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듯 선풍기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게도 보였다.

이런 내용으로 시를 써서 출력해 젊은 직원들에게 주었더니 난리가 났다. 엄지 척 한 미키마우스 스티커를 붙여 직원휴게실 벽에 붙여놓으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실은 이 시가 은근한 질책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여간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잔소리 안하고 참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을 인자 세 번 모이면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는 옛 말이 헛말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귀엽던 젊은 직원들이 한꺼번에 모두 퇴직했다. 한 명은 친구와 같이 카페를 하겠다고 지방 도시로 내려갔고, 또 한 명은 인천 공항 보안 검색 요원으로 취업했다. 좁은 클리닉에서 답답하게 근무하는 것을 더는 못참겠다고 긴 머리카락이 주인을 꼬득인 것이 아닐까.

어떻든 매력적인 긴 머리카락을 마음껏 휘날리며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간 것이다. 나의 클리닉에서 젊고 긴 머리카락이 다발 채 사라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은 클리닉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긴 머리카락이 전혀 없다. 깨끗하다고 그저 좋은 것은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