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린 원장(서울 서초·아름다운피부과의원)

짧은 여름방학을 마치고 딸이 떠났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여러 해 반복되는 이별이지만 나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되었나보다. 공항 터미널에서는 웃으면서 한참을 같이 수다 떨었는데 게이트 안으로 딸을 들여보내고 돌아서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과 떠나가는 것, 어떤 것이 더 힘든 일일까?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서 문득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을 발견하고 다시 목이 메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큰 이별과 마주하기 전,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하지만 한결같은 슬픔이 반복될 뿐 거기에는 내성도 없고 예방 주사도 없다. 다만 더 이상의 상처를 막기 위해 내 모습을 포장할 뿐이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와 진실한 만남이 시작되고 지속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서로가 살아온 인생의 방향과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가버린 것은 아닌지 주저된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 사이에도 도저히 만회할 수 없는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있듯이 새로 만난 사람들 중에도 보석 같은 친구가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뜻하지 않은 마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은 그들에게 거는 내 기대가 지나치게 컸거나 성급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 가깝게 지내던 언니 같던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원인은 유방암이었다. 우리는 아이를 기르면서 같은 학부형으로 알게 됐고 오랜 동안 친하게 지냈다.

그는 수년 간 투병을 하고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병을 알리지 않은 채 견디다가 이제 대학교에 입학한 막내를 두고 떠났다. 수년 동안 자신의 병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는 혼자서 천천히 갈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매달 한 번씩 만나는 모임에서도 그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좋은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작지만 정겨운 선물들을 이렇다 할 설명이나 이유도 없이 우리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왜 그가 까닭도 없이 선물을 주는지, 별일도 아닌데 이 핑계 저 핑계를 만들어 자꾸 밥을 사는지 우리는 그 당시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하게 된 뒤에야 그는 비로소 고백하듯이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 한 편 한 편 시를 써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시는 감사와 행복으로 넘쳐 있었다.

마지막 문병을 갔을 때에도 다 빠져버린 머리카락을 예쁜 털모자로 감추고 가녀린 목소리로 아들이 예쁜 여자 친구와 언약식을 한 이야기를 기쁨에 들떠서 이야기 해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몇 달 동안 아무도 모르게 벌인 작은 축제, 우리는 거기 초대받은 행복한 손님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 인간이 가는 길이 얼마나 평화와 감사와 행복으로 가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이제 성인이 되었으나 유난히 작아 보이는 세 아이들이 흐느끼고 있었다. 큰 덩치로 두 눈이 빨갛게 붓도록 우는 그의 아들을 안고 나는 오래오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엄마는 진실로 훌륭한 내 친구였다고, 그런 친구를 잃어버린 내 슬픔과 절망도 크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내 가슴에 묻어두었던 잔잔한 고백을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우정도 고백을 해야 할 찬스가 있는 것인데. 결코 응답을 바라지 않는 우정, 그것만의 고백을.

오늘은 문득, 이런 저런 이유로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나를 떠나간 많은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그들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서둘러 그들을 떠나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그들과의 이별이 내게 남겨 준 슬픔보다 그 상처를 통해 성숙해진 내 모습을 바라보기로 한다.

그리고 부족한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참아주고 믿어주고 옆에서 지켜봐 준 많은 사람들을 조용히 생각해 보기로 한다.

크고 작은 여러 이별들, 그럴 때마다 유난히 거대한 뒷모습을 보이면서 떠나간 사람들. 그들의 거절 혹은 배신이 내게 던진 낙심과 절망, 그로 인한 상처들로 나는 조금씩 더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성장했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를 떠나가게 되는 날에는 남아 있는 이들에게 슬픔이나 상처보다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고 싶다.

세상의 모든 이별들이 무작정 슬픈 것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