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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기숙사의 세 글자
청진기 기숙사의 세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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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7.1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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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 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늦여름의 오후였다.
"오늘 기숙사 청소하러 가야 돼."
아내가 말했다.
"아! 오늘이었나. 알았어."
대답을 하고 따라 나섰다.
"다 큰 녀석들인데 지들 방은 지들이 치워야지 이거 원."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청소도구와 이불을 챙겨 차를 몰고 나갔다. 흐린 하늘이 지루한 장맛비를 뿌리고 있었다.

기숙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방학 내내 사람이 없었던 터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퀴퀴한 냄새는 코를 찔렀고 쓰레기도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었다.

날씨마저 습하고 후덥지근해 가슴이 답답해졌다. 5층의 좁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아들이 생활할 방에 도착했다. 셋이서 함께 쓰는 방이었다. 문 앞에 붙어있는 이름들을 확인하다가 아들의 이름이 쓰인 곳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이 세 글자는 왜 이토록 내게 큰 의미가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청소를 시작했다. 한 평 남짓 되어 보이는 좁은 방에 살림은 낡은 2층 침대 두 개, 허름한 책상과 옷장이 역시 두 개씩이었다. 바닥을 쓸어내고 대걸레질을 하는데 너무 좁아 오히려 힘이 들었다. 여기저기의 구석과 틈을 닦아냈다. 손을 깊숙이 찔러 넣어야 하는 곳도 많았다. '좀 더 깨끗한 곳에서 살게 해줘야지' 하는 마음이 손과 발을 쉴 새 없이 재촉했다.

커튼과 창문까지 닦고 침대의 위층에 올라가 쭈그려 앉아 치워내고 나니 내 거친 숨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어느덧 땀이 비 오듯 했고 얼굴과 몸 전체가 젖어 끈적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좋았다. 얼마 만에 순수한 노동으로 흘려보는 구슬땀인가. 땀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몸과 마음의 온갖 묵은 찌꺼기들이 빠져 나간 것 같아 상쾌했다.

눈에 땀이 들어가 뜨기가 힘들었다. 눈물과 땀으로 눈가가 질펀해지고 나서야 겨우 눈이 떠졌다. 그래도 그 땀이 싫지 않았다. 이 기숙사에서 살 권리를 얻기 위해 아들이 흘린 땀을 생각해 보았다. 아내도 발그스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땀을 닦고 있었다. 침대의 2층에서 매캐한 먼지를 마셔가며 매트리스 덮개를 어렵사리 씌우고 나서 내려오니 마무리가 된 느낌이었다. 아내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청소를 하는 동안 그간의 일들이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던가. 지난해 4월, 이 학교의 입학시험이 두 달쯤 남았던 그 날, 등굣길에 아들이 그토록 참혹한 교통사고를 당하던 그 날이 떠올랐다. 꽃송이가 땅 위에 떨어져 내리듯 바로 내 눈앞에서 차에 부딪혀 쓰러져 있는 의식 없는 아들의 피 묻은 얼굴을 바라보며 절규하는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 울다 하던 그 때가 자꾸 어른거렸다. 119대원들과 경찰이 분주히 오가던 모습, 행인들이 놀라 피해가던 모습도 그 위에 겹쳐졌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충격 속에서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 깨웠다. 간절함이 전해진 걸까. 의식을 되찾아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아 주었다. 하늘이 우리 가정을 긍휼히 여겨 아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준석아! 이 시험 보지 말자. 어느 학교에 가서든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입원실에서 내가 말했을 때 녀석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돌아누워 버렸다. 어느새 눈물이 어리는 아내의 눈과 마주치기가 싫어 병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병동에서 무심히 자기 일을 하는 간호사와 주치의들이 보였다. 카트에 실려 가는 약과 주사, 복도를 서서히 거니는 환자와 보호자들, 독특한 병원냄새, 내겐 익숙한 이 모든 것들이 그 순간 무척 낯설었다. 괴롭게도 그 때 이제껏 아빠로서 잘해주지 못했던 일, 상처를 주었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청소를 마치고 다시 보니 썩 쾌적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 방이 하루하루 내 아들의 꿈이 무르익어가는 곳이라 생각하니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 방에서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지친 몸이 쉼을 얻고, 가끔은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하겠지. 곤한 하루를 보내곤 엄마 아빠가 깔아준 저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새벽이면 달갑지 않은 멜로디에 잠을 깨 이불에서 나와 세숫물로 졸음을 털어내며 하루를 시작하겠지. 방 여기저기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낄낄거리고 장난도 치고, 때론 진지한 대화도 나눌 테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들이 제 인생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알뜰하게 채우고 꾸려나갈 참으로 소중한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을 뒤로 하고 복도로 향하려는데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 방을 뒤돌아보았다. 방 문 앞의 '세 글자'에 다시 한 번 시선이 머물렀다.

'그 날의 사고에서 생명을 지켜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저 아이를 늘 보살펴 주세요. 또 이곳에서의 생활이 때론 힘들더라도 끝까지 잘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나니 돌아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숙사를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젖었던 땀이 식어 등이 서늘해져서인지 더위가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비는 멎었고 먼 하늘 한편이 맑아지고 있었다.

"자식 키우기 참 힘들다. 그치?"
아내가 말했다.
"그러게."
나도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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