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작년에 왔던 봄꽃이 피어
장롱 속 봄옷 꺼내
다시 입어본다

꽃을 주고
잎을 주고
열매를 주고

꽃나무는 허리만 굵어져
봄옷 허리가 모자란다
다리 쪽은 더 헐거워졌다

함께 넣어 둔 탈취제 탓이겠지
향기 바랜 꽃잎 바람에 흩날리고
봄이 다 가기도 전에 옷이 먼저 시들었다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가 되면 장롱 속에 보관해 두었던 옷을 꺼내 미리 입어본다. 다시 입을 수 있는지 바꿔야하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전에 입던 옷이 분명한데 어째 조금씩 어색해진 것을 매번 느낀다. 옷의 디자인이 현재의 유행에 뒤지는 것도 이유일 것이고, 중년의 체형이 옷을 받아주지 않는 면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변해가는 체형을 옷이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점점 배가 나와 허리는 굵어지고, 다리는 가늘어지는 체형변화가 직접 확인되는 서글픈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작년과 올해 단과 폭을 수선한 바지가 족히 열 벌은 되어 이것저것 선택의 폭이 넓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그나마 마음에 들게 수선된 몇몇 바지만 돌려 입게 되고 나머지는 그냥 옷장에 걸어 두었다가 계절이 지나가면 그대로 다시 보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몇 날 몇 주 입지도 않았는데 궁상을 떠는 내 모습이 미워보였던지 아내는 새 바지를 구입해 주었다. 아무래도 새 옷은 날개요 꽃잎과 같아 한결 산뜻하고 화사해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중년 남자의 모습을 화사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지만 예전에 입던 옷은 이미 향기가 날아간 꽃잎이요, 새로 산 옷은 새로 핀 꽃이라는 생각에, 꼭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화사하다고 표현해 본 것이다. 새 옷으로 꽃을 피운 중년 꽃나무가 된 것이다.

나무가 매년 꽃을 피우고, 꽃을 떨구고, 열매를 맺고, 겨울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부활의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면, 나무들이 동물들 보다는 진화 단계에서 한 수 위의 차원을 차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식물학자의 전문적 안목으로 속사정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을 수는 있지만, 빛과 수분과 흙속의 미량원소들을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풍성하면 풍성한대로 섭취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보는 이의 시선에 흔들리지도 않고, 의기소침하거나 기고만장하지도 않고 매년 흔들림 없이 다시 시작하는 꽃나무의 무념무상의 항상성(恒常性)은 인간이 획득하기 어려운 높은 정신적 경지가 아닌가 싶다.

한 때 꽃 같은 시절이 없었던 중년이 어디 있겠는가. 가지마다 무성한 잎새를 달고 열심히 광합성작용을 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탐스런 몇 개의 열매도 맺어 좋은 가격에 시장에 내다 놓은 경험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중년들은 나름대로 꽃을 피웠다 열매를 맺은 꽃나무라고 불리워 마땅하다.

이 시를 의사 수필 동인 모임인 박달회에 가서 낭송했더니 원로 선배께서 다가오셔서 '나도 요즈음 옷을 입으면 다리가 가늘어진 것을 느껴'하시는 것이 아닌가. 꽃나무가 꽃나무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듯 생각되어 잠깐이나마 감동의 시간, 시의 순간을 경험했었다.

그 이후 꽃을 주고, 잎을 주고, 열매마저 모두 자식들에게 주고, 몸통은 굵어지고 하체는 가늘어지며 고목이 되어가는 모든 꽃나무들이 한결 가깝게 느껴진다. 중년 꽃나무의 눈에 연민의 꽃이 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