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오감은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엄마의 뱃속에서도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첫 몸짓은 소리에 대한 반응이다. 임신 20주 즈음엔 엄마 목소리를 인식하고 33주가 되면 소리에 따른 감정 변화가 나타난다. 태교는 뱃속 아이에게 좋은 소리를 듣게 하고픈 엄마의 마음이다. 인간은 소리와 함께 태어나 소리를 좇으며 소리를 누리고 소리를 즐긴다.

유종훈 원장(부산 해운대구·미소메디칼내과의원)은 음악 속에 산다.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들인 품이 녹록지 않다. 그의 집안 한 공간에 들어서면 하이엔드 AV(Audio Video) 기기의 향연이다. 천정엔 유산이 된 명품인 벨기에 바코(BARCO)사의 3관식 CRT 프로젝터가 웅장하게 매달려 있고, 영국 메리디안의 AV 프로세서를 비롯 프랑스 포칼의 제이앰랩 스피커 및 8개 우퍼, 미국 스튜어트의 110인치 스크린, 독일 젠하이저의 헤드폰 HE 1 등 세계적인 걸작들이 즐비하게 서로를 뽐낸다.

열 두평 남짓 이 곳에서는 악세사리 하나 케이블 한가닥에도 그의 손길이 머문다. 그대로 그의 삶이다. 의대 입학때부터 30여년 동안 이어진 그의 '소리사냥'은 깊이를 품고 품격을 더했다.

 

 

음악과 AV기기는 그의 삶이자 굴레다. 언제부터일까. 왜일까.

"어린시절부터 교회 성가대를 하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움텄던 것 같습니다. 의대에 입학한 후 좋아하는 음악이 담긴 LP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취미가 없었기에 부모님께서 주시는 용돈의 대부분을 음반을 사는데 썼고, 대학1년 때인 1983년 한 해에만 52장이나 구입했습니다. 매주 한 장꼴이었습니다. 당시 부산은 지리적인 영향으로 일본 음반이 밀수로 들어와 일명 '빽판'(불법 복제판)을 접하기 쉬웠습니다. AV기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의 세운상가와 같이 부산 남포동에 가면 온갖 기기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음반을 하나 둘 씩 갖게 되니 자연스레 오디오기기쪽으로 관심이 옮겨 갔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구성이었지만 첫 오디오시스템을 갖게 된 것도 그 시절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좋은 음악과 기기에는 설렘이 앞섭니다."

고풍스런 턴테이블 위에 올려진 바늘 끝 카트리지를 통해 음반의 결을 느끼던 때는 추억으로 남는다. 그동안 발품 팔며 소장했던 LP와 CD 2만장도 아쉬움속에 '정리'했다. 지금은 좋은 음원을 통해 최고의 소리를 찾는다.

▲ 유종훈 원장이 국내 1호로 구입한 독일 젠하이저의 하이엔드 헤드폰 'HE 1'. 이어컵에 통합된 Cool Class A Mos-Fet 고전압 앰프를 통해 모든 외부 소음이 차단된 환경에서 순도 높은 사운드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손 때 묻은 앨범이었지만 보관 공간도 협소하고 LP·CD 앨범이 변형되면 좋은 소리를 기대하기 어려워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CD는 고음질을 구현한 SACD(Super Audio CD)뿐입니다. CD 1만장을 담을 수 있는 8테라(TERA) 용량의 하드디스크에 CD를 화일로 변환시키고, 일반 CD와 고음질 CD로 구분해 저장했습니다. 최근에는 음원을 주로 구입합니다. 국내 음원사이트는 고음질의 음원을 발매하지 않아서 주로 외국 사이트를 이용합니다."

음악에 쏟았던 열정은 시나브로 AV 전영역으로 확장된다. 그의 공간을 가장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기기도 RGB 3관식 CRT 프로젝터다.

"세계적 프로젝터 전문사인 벨기에 바코사의 3관식 CRT프로젝터는 최근 대중화된 1관식 DLP(Digital Light Processing)만큼은 아니지만 블루레이급 영상을 구현합니다. 십여년이 지났지만 큰 문제 없이 구동되는데다 함께 지나온 세월만큼 애착이 많이 갑니다. 얼마가 될 지 모르지만 이 기기가 수명을 다하면 DLP프로젝터로 그 자리를 메울 생각입니다.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을 함께 들여야 해서 아이들이 함께 하기 어려웠지만, 영상물을 통해서는 교감하고 소통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이 기기에는 커가는 아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AV 마니아에게 정보력은 필수다. 하루가 다르게 플래그십 모델이 새롭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까지 소장한 대부분의 기기는 업그레이드를 마쳤다.

"국내에는 AV전문 매거진이나 매체가 활성화돼 있지 못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지만 여러 전문가들의 도움도 받습니다. 국내에 판매되지 않는 음원이나 기기 등을 구입할 때는 외국에 있는 친지나 지인을 통하기도 합니다. 국내에서 기기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접하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직접 느껴 봅니다."

최근 마음을 빼앗긴 기기는 헤드폰이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궁극의 AV시스템을 갖춰 놓고 왜일까?

 

"아무래도 공동주택에서는 AV기기를 제대로 즐기기 어렵습니다. 방음을 해도 진동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헤드폰이 좋은 점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저만의 시공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영국·독일의 헤드폰을 써 봤는데 각각의 특성이 있습니다. 클래식·팝·재즈 등 장르별로 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얼마전 구입한 독일 젠하이저의 'HE 1'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말그대로 충격이었습니다. 분명히 헤드폰을 썼는데 떨어져 있는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듯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확실히 다른 소리였고 그 소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즐기는 음악엔 경계가 없다. 클래식·팝·재즈에 최근에는 가요도 즐겨 듣는다. 그것도 에이핑크를….

"사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갖가지 외부 일정이 끝나면 오후 9∼10시쯤 집에 옵니다. 그 때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1시간여 남짓 음악을 듣습니다. 보통 외출 때는 아스텔 앤 컨(Astell & Kern)에서 만든 MP3 'AK 380'를 지닙니다. 이 안에도 수천곡이 들어가는데 길에서도 차에서도 고음질의 음원을 즐길 수 있습니다. 특별한 장르에 치우치기보다 다양하게 듣습니다. 비발디 <사계>, 셀린 디옹 <All The Way…A Decade Of Song>, 퀸 <A Night At The Opera>, 데이브 부르벡 콰르텟 <Time out> 등이 장르별로 좋아하는 앨범입니다. 가요는 아이돌음악까지 즐깁니다."

그의 공간은 때로는 사랑방이 되고 전시장이 되고 공연장이 되고 교육장이 된다. 사람과 음악이 공존한다.

"십여년 전만 해도 주말마다 지인들과 음악을 함께 들었습니다. AV 입문자부터 마니아까지 여러분들이 저희 집을 찾았습니다. 1년 동안은 예약을 받고 시간 조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음악이야기, 기기이야기, 사는 이야기로 우리들의 시간을 채웠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지나온 기록을 글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행복한 여정을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는 지난 4월부터 부산 해운대구의사회장을 맡았다. 분주한 일상에 짐이 하나 더 얹어졌다.

"해운대구의사회원이 400명 정도됩니다. 그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진료를 충실히 하려면 무엇보다 건강해야 합니다. 건전한 취미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의사회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학술대회도 문화행사와 함께 열고 있습니다. 의사회에 대한 작은 관심들이 모아지면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최근 서울나들이가 잦다. 이번엔 오페라다. 얼마전에는 오페라 평론가이며 부산의대 선배인 박종호 풍월당 대표를 초청해서 부산에서 오페라강좌를 열기도 했다.

"아! 이래서 오페라를 보는구나…."

오페라에 대한 그의 첫 느낌은 '늦바람'급이다.

음악을 향한 그의 에너지는 화수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