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민들레 사라지다
청진기 민들레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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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6.0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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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 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아파트 계단 틈새에서 자라던
민들레가 사라졌다
저 계단에 틈이 생겼을 때
맨 먼저 바람이 들어가
좁고 캄캄한 안쪽을 둘러보았을 것이고
빗물도 흘러들어 한동안 머물렀을 테지
스며든 빗물이 모두 말랐을 때
따라 들어갔던 풀씨는
죄 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가
햇살이 기웃거리는 봄날
궁금한 바깥으로 싹을 내밀었을 것인데
민들레는 한해살이를 끝으로 떠나겠지
뿌리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꽃도 피울 수 없던 저 곳 생각이 나면
부르르 진저리 치겠지
이리저리 관심을 끌던 민들레가
오늘 아침 사라졌다
새벽부터 부지런한 경비 아저씨 손에
한 움큼 잡초가 들려있다

요즈음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토종 민들레는 하얀 꽃이 핀다는데 눈에 띄는 것은 주로 노랑꽃이다. 벌써 꽃이 지고 솜사탕처럼 둥글고 보드라운 씨가 맺혀 있는 민들레와 꽃이 피어 있는 민들레와 아직 잎새만 자라고 있는 민들레가 공존하고 있다.

아마도 꽃 피는 계절이 다른 식물에 비해 긴 모양이다. 야생화 도감에 의하면, 민들레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토양의 비옥도에 관계없이 잘 자란다고 소개돼 있고, 꽃피는 시기는 4월에서 5월까지로 나와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10월에도 꽃이 핀다고 덧붙여져 있다.

흙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모든 거리가 포장된 서울의 보도블럭 틈새에서도 자라고, 담장 밑이나 길가 구석에서도 자라고, 가로수 밑 흙이 드러나 있는 좁은 땅에서도 자라는 걸로 보아 대단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현관 계단에서 자랄 줄은 정말 몰랐다.

제일 아랫 계단의 틈새로 민들레 씨는 어떻게 들어갔을까. 아마도 바람결을 타고 낙하산처럼 날아 앉아 계단 틈새 근처에 붙어있던 민들레 씨앗이 봄비가 올 때 빗물과 함께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틈새는 좁고 볕이 들지 않아 노출된 지역보다는 습기를 오래 간직할 수 있어 싹을 틔우는데 적합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공간이 너무 좁아 충분히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에는 너무 좁지 않았을까. 그나마 올해는 싹을 틔우고 잎새가 자라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꽃을 피울 수는 있을까. 민들레는 여러해살이풀이라는데 내년에는 어떻게 될까. 계단에서 노란 꽃을 언제쯤 보게 될까.

꽃을 피우지는 못하더라도 잘 자라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신통한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민들레를 바라보곤 했는데, 어느 날 아침 민들레가 사라졌다. 저 멀리 보이는 경비 아저씨의 손에 한 움큼 잡초가 들려 있었다.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은 참 부지런하다. 경비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청소를 하거나, 출근하는 주민들의 차를 함께 밀어주거나, 화단에서 잡초를 제거하거나, 전지가위로 나뭇가지들을 다듬어주며 한시도 쉬지 않고 아파트를 돌본다.

아파트 주변 환경까지 돌보아야하는 경비 아저씨들 입장에서 볼 때 그 민들레는, 꽃을 피울지 어떨지 궁금한 대상이 아니라, 계단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잡초에 불과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파트 화단에서 자라던 단풍나무 싹들, 어렵사리 싹을 틔운 아기 소나무들도 모두 잡초에 불과할 뿐이어서 어느 날 갑자기 제거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같은 식물에 대해서도 이해관계 전혀 없이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상일 때와 업무상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때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농부들이 밭에 난 잡초들을 모두 아름답고 소박한 야생화라고 생각해 언제 어떤 꽃을 피울까 궁금해 하며 두고 본다면 경작지는 그야말로 초원으로 변할 것이고 생산성 높은 효율적인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런 사람은 농부로서는 부적격이라 하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생산력이 풍부한 농부보다는 한눈 파는 농부에 가까운 성향인 까닭에 농사를 짓거나 아파트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더라면 큰일을 낼 뻔했다.

그러나 그런 성향이 환자를 보는 데에도 적용이 될 것이어서 효율성이나 경제성으로 평가한다면 나의 클리닉 운영은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그나마 한눈을 팔더라도 티가 덜 나는 의사이기에 천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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