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락 원장
'밥을 먹을 때는 아무 말을 하지 말고, 잠을 자려할 때에도 말을 하려하지 않는다(食不語 寢不語)'라는 말을 논어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할 때에는 오로지 그곳에 최선을 다 하라'는 말이다. 옛날에 '마음껏 먹어라'라고 한 것은 '배불리 먹되 깨끗이 다 먹어라. 그릇에 남겨서 더럽히지 말라'는 말이다. 먹는 행위 뒤에 깨끗이 할 것도 포함돼 있다.

유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일이나 사물에도 낮춤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 값어치를 두었다. 물과 숲, 산과 천지, 그리고 자연 등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 모두에는 그것의 가치를 두었다. 인간을 위한 도구로만 보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는 자연 물을 취하되 남용하지 않도록 했다. 낚시질은 하되 그물로 넘치게 잡지 말고, 새를 잡되 잠자는 놈마저 잡지는 말라고 했다. 도망을 가는 놈은 갈 수 있도록 했다.

생명에 대해 공자는 '∼을 위하여'라는 생각을 갖지 말 것을 권했다. 새를 잡는다면 그냥 필요한 만큼 잡으면 되지만, '∼위하여'를 생각하면 수단이나 목적을 위해 더 많이 잡을 생각을 갖게 된다고 했다.

이런 것을 자제하기 위해 공자는 논어 호학(好學)편에서, '배우고 또 그것을 익히면 즐거운 것이 아닌가(學而時習知 不亦悅乎)?'라고 했다. 일상을 재발견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만 사물을 보는 눈을 새로이 뜨게 돼서 새로운 시야를 가진 사람으로 재탄생한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평소에 태무심하게 보던 사실에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면을 볼 수 있단다. 이때 그는 새로이 나타나는 경이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세상을 내가 중심이 아닌, 나는 오직 자연의 일부가 되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시공의 한 부분이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흘러가는 물을 내려다보면 그냥 단순히 흐르는 물이 아니고, 그것에서 어떤 의미를 느끼게 된다고 했다. 이때 무심코 바라보던 나는 내가 아닌, 물가에 서 있는 손님으로서 배경의 한 부분이 돼버린다.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왔던 내가 사라지고, 개천에 불과했던 흐름에서 갑자기 진리의 자연스러움 속에 깊이 빠져 들게 된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저 흘러가는 물임을, 물이 곧 진리임을 깨닫는 생각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까지 물을 관장해 지배해 왔다. 물길을 막아서 댐을 만들고 물가의 수초나 작은 생물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는 세상의 주인공은 나, 인간이 아니요, 자연과 하나님임을 안다.

지혜로운 자라야 물을 좋아하는 법을 안다(知者樂水). 아름다운 산이나 좋은 경치는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다. 어떤 경치를 보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래서 그 장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으로 남겨두려 한다. 그러나 그 경치는 내 사진의 배경이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제 스스로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지, 어찌 인간을 위하여만 존재하겠는가(天地不仁)?

그러나 인간은 자기들 필요에 따라 계곡에다 상수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강의 흐름을 바꾸어버리거나 운하로 만들기도 한다. 또 바다를 영해로 구획해서 우리 바다라느니 너희들 영역이라고들 한다. 강을 농경을 위해 물굽이를 바꾸고, 개천을 용도에 따라 변화시키는 대상으로 여긴다. 그래서 하천을 관리하고 강을 정비하는 부서를 인간들은 만들어 둔다. '하천 관리 공사'라던가? 온통 시멘트로 처바른다.

이렇게 현실을 떠나 착각에 빠져 있는 나를 깨우쳐서 사물을 바로 보게 만들어야 한다. 대상이나 견해에서 주관적으로 비판과 간섭, 또는 무관심을 나타내기만 하였던 것에 대해서는 도리어 관조와 섬기는 자세를 갖는 것이 '자연 속의 인간으로 재탄생'되는 길이다. 이런 것을 반복하다보면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때서야 자연이 '말없이 묵묵히 그냥 있는 줄 알았는데, 활발하게 살아 숨 쉬고 있구나!'를 체험하게 된다.

이런 뒤집어보기 체험이 느낌을 통해 몸에 사상으로 녹아들 때, 기쁨이 온 몸을 휘감으리라고 공자는 전망했다. 그래서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한 말은 너(자연)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이 세상의 주인공임을 깨닫는 순간이 된다. 이 순간 내 속에서 기쁨이 넘쳐서 터져 나오게 된다.

무의미하고 심드렁한 나날을 어떻게 하면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상대를 도구로 보는 것은 에고(ego) 덩어리인 자기 자신(己)이다. 이런 자기나름의 단독자로 살아가려는 나를 이겨내어서, 상대방과 더불어 살아가는 순간이 되는 것(禮)을 말한다. 이때 세상은 인(仁)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바뀐다고 공자는 말했다.

복례란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경계를 툭 틔면서 '우리'로 승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예(禮)는 사물이나 사람을 세계의 주인공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나(에고) 중심에서 벗어나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고 수행해 '우리'의 세계로 돌아가는 지향성을 갖고 있다.

복례는 '위하지 않는 정신'을 지향한다. 준다면 그냥 주는 것이지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 어질지 않다. 바란다면 상대에게 부담감이나 미안함, 그러기에 베푸는 자에게 느끼는 지배를 당하는 느낌, 그래서 차별의식이 자꾸 커져서 결국 마지막에는 권력의 세계로 가게 된다.

생태의 관점에서도 극기복례를 읽을 수 있다. 된장을 만들 때 콩은 적대적일지도 모르는 소금을 받아드리고, 소금은 콩으로 녹아든다. 소금은 제 몸이 사라진다(克). 된장으로 발효된다. 콩이 소금으로 어울려 새로운 물질(復), 된장이 된다. 곧, '우리'로 승화하는 경지(禮)를 말한다.

절대적 타자가 합해 하나로 변한다. 소금이 콩을 위하지도 자기를 위하지도 않고, 승화(克)된 된장으로 식탁에 나타난다. 제 몸을 녹이는 것이 어려울까! 얼마나 아플까! 그래서 이는 단순한 바뀜(變)이 아니라, 승화(克)로 표현했다(다른 책에서 따옴).

콩이 그냥 두어버리면 부패해 썩고 만다. 썩지 않고 자기애(自己愛)에 빠진다면 결국 똥이 된다. 소금 영접으로 극복해 발효된 것이다.

인디언의 습관에는 남에게 물건을 줄 때에는 내 버리듯이 주어버린단다. 그렇게 함으로서 상대가 미안함이나 고마움을 느끼지 않도록 한단다.

내가 먼저 '그대의 근심이 있는 곳'에 손을 내밀어, 서로 손을 잡을 때라야 '우리'가 될 수 있다. 공자(孔子) 식으로 말하면, 손을 내 미는 것은 극기요, 그대의 손을 잡는 때는 복례의 순간이다. 우리로 변모하는 순간, 인(仁)으로 승화하는 때이다. 극기복례가 곧 인(仁)이다. 내가 변하는 순간, 세상이 변한다는 이것이 공자가 주장하는 생태 유지의 원리이다.

인(仁)이란 '함께 더불어 하기'이다. 그 원동력은 '그대가 있기에 나는 존재한다'이다. '내가 있기에 너가 있다'는 자기애(自己愛)에 가득 찬 것에서 '그대가 있음으로 내가 존재한다'로 전환하는 순간(克) 평화의 길은 열린다.

'당신·부모·형제·농부·친구가 있기에 겨우 내가 존재할 수 있다'로 바뀔 때 함께하기가 가능해 진다. '사람다움'이란 너와 나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데, 그것은 너를 나의 대상이나 수단이 아니라 도리어 네가 있음에 내가 존재함을 깨닫는 그 순간에 문득 드러난다. 이 순간, 세상은 인(仁)으로 바뀔 것이다.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게(日新又日新) 여기면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