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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겨울날, 오후 네 시
청진기 겨울날, 오후 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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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2.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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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린 원장(서울 서초·아름다운피부과의원)
▲ 이하린 원장(서울 서초·아름다운피부과의원)

오랜만에 오후의 양재천변을 산책했다. 그동안 내가 거닐었던 양재천은 주로 해가 진 뒤 어둠 속의 양재천이었다. 벚꽃이 팝콘처럼 탐스럽게 꽃송이를 터뜨릴 때도, 은행잎이 카펫처럼 푹신하게 쌓였을 때도, 눈이 아득한 평원처럼 쌓인 겨울 풍경도 이렇게 밝은 오후 네 시에 볼 수는 없었다.

저녁 산책에서 보았던 풍경들은 노오란 조명을 받으면서 낮의 그것보다 훨씬 더 외롭고 처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한낮에 반짝이는 햇살을 마주하며 서두르지 않고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내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대낮의 산책은 나에게는 오랫동안 금지된 사치처럼 여겨졌다. 어쩌다가 낮에 외출해 오랜 시간 밖에 있다보면 나는 떳떳하지 못한 일탈을 저지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개원을 한 의사일 경우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나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 평일의 꿀맛 같은 오프가 주어진지 일 년 남짓,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낮의 거리를 여유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걸어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고 어쩌면 시시한 소망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마치 타국의 거리를 걷듯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하고 거리의 풍경을 둘러보며 하릴없이 걷고 싶었다. 그런 날에 실눈을 뜰 정도로 반짝이는 햇살에 샤워를 하듯이 감싸일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할 것 같았다.

지난 봄에는 드디어 벚꽃이 바람에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영화 같은 풍경을 보았다. 비 내린 뒤 촉촉하게 젖은 단풍잎, 그 빛이 얼마나 깊은지 보았고, 아름다움은 슬픔과도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오의 한적한 가로수 밑을 걷다보면 사다리꼴처럼 죽 뻗은 길 끝이 가물가물하다가 사라진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지만 새로운 발견들은 나에게는 황홀한 경험이었다.

피어 있는 꽃만 아니라 스러지는 것도 피어나는 것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그 처절하도록 환상적인 오렌지빛 하늘, 다시 땅에 떨어져 흙이 되기 전 눈부시게 찬란한 낙엽들도 그렇다.

그들에 대한 경외감이 새삼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나 또한 인생의 그런 시간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본다. 

부쩍 짧아진 낮의 길이 때문에 오후 네 시인데도 해는 이미 산등성이로 내려앉아 있다. 며칠 바람이 불더니 하늘은 차갑게 푸른빛을 띠었고, 오랜만에 올려다 본 나무들은 커다란 이파리들을 거의 떨어뜨린 채 나목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겨울은 이미 깊어질 만큼 깊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마른 가지 옆에 아주 가느다랗게 솜털처럼 붙어 있는 수많은 잔가지들이었다. 월동 준비를 하느라 새끼줄에 감겨있기도 하고, 나무 밑동 그대로 껍질을 드러낸 채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나무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죽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록 이파리를 새로 피우고 꽃봉오리를 움틔우기 위해 여전히 대기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파리가 떨어지면서 잔가지가 더욱 많이 생겨 이파리 대신 잔가지들이 나무줄기를 쓰다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채근하거나 지켜보지 않는 사이, 바로 이 순간에도 나무는 아주 성실하게 봄의 새순이 잘 나올 수 있도록 물을 길어 올리고 있다. 겉으로만 힘이 없고 건조해 보일 뿐 그들은 강인하다.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면서도 유연하게 흔들리는 잔가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겨울을 이기는 순응을 배운다.

자연은 언제나 좋은 지혜를 일깨워주면서 내 교과서가 되어 왔다.

높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나뭇가지처럼 몸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 흐름이 막혔을 때는 개울물처럼 기다려야 한다는 것, 견디기 어려운 기후에서는 죽은 듯이 잎을 떨어뜨리고 안으로 양분을 저장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환호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 뒤에는 처절한 기다림과 어두운 시간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자연이 알려주었다.

한겨울 저 나무의 수많은 잔가지들 그 생명력의 뜨거운 박동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금 봄을 맞기 위해 무슨 준비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내가 피워낼 꽃의 이름과 빛깔에 대해 다시 점검해 본다. 아직은 뜨거운 열정으로 꿈을 꾸어야 하는데도 너무 오랜 겨울잠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봄이 바로 문 앞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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