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감나무 있던 자리에
청진기 감나무 있던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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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2.0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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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 홍지헌 원장(서울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설 쇠러 내려간 고향에
  아버지 안 계시고
  큰댁에 큰아버지 안 계시고
  눈구름에 가려 서쪽 하늘 아래
  두타산(頭陀山) 안 보이네
  큰댁 사우(祠宇)에 모여
  늦은 차례를 모시고 나니
  그쳐가던 눈발 다시 굵어지고
  감나무 있던 자리에서
  꽃을 피운 매화나무
  다듬지 않는 가지마다
  눈 녹은 물방울 영롱하네

매년 명절 연휴가 되면 차례를 지내러 고향으로 간다. 설레는 마음도 있고 옛 생각에 잠겨 감회에 젖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아쉬움과 문제점도 있다.

명절 연휴라는 것이 개원의들에게는 부담 없이 여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이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큰 아쉬움이고, 매년 시댁으로 차례 지내러 함께 내려가는 아내의 심정도 헤아리고 해결해야하는 더 큰 문제점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강릉 어머니 댁에 모여 아버지 차례를 먼저 모시고 서둘러 동해시에 있는 큰댁으로 가는데, 큰댁에도 큰 아버지께서 안 계시는 관계로 큰형님이 집안의 종손으로 차례를 주관하신다. 작은댁 가족들은 저마다 따로 차례를 모신다고 고향으로 내려오지 않은 지가 오래돼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큰댁의 모습은 큰 형님이 관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창고 겸 닭장으로 쓰던 부속건물을 헐고 작은 정자를 지었고, 조상님들께 제사를 올리는 사우(祠宇) 주변을 정리해 조경용 관목들도 많이 심었다. 사우 뒤 대나무 밭도 많이 솎아내어 답답하던 모습이 없어져 한결 훤해졌다.

대나무 밭 옆을 지나 우물로 가는 길은 돌담으로 막아 정자와 사우와 본채 툇마루 사이에 아늑한 공간이 생겼다.

예전에는 사우 뜰에 매화나무와 배나무와 전나무가 있었다. 가끔은 구정 차례를 지낼 때 일찍 핀 매화꽃을 보기도 했었다. 어린 생각에도 이렇게 추운데 꽃이 얼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매화나무와 배나무는 어떻게 없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나무는 태풍 때 쓰러지며 본채의 기와지붕 모서리를 손상시켰던 기억이 난다. 한 동안 상흔이 남아있었는데 지붕을 수리할 때 함께 손을 보았다.

매화나무가 없어진 것이 아쉬워 큰 형님은 강릉의 유수한 집안에서 묘목을 구해 본채 앞 감나무가 있던 자리에 심어놓았는데 몇 년 전 눈발이 날리던 구정 차례 때 꽃망울을 터뜨렸던 것이 옛일을 떠올리게 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 가지도 다듬어주지 않아 손길이 부족해 보였는데 기특하게도 꽃을 피운 매화나무가 고마울 뿐이었고, 집안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해주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더구나 별로 키도 크지 않은 나무가 오락가락하는 눈발을 의연히 맞으며 꽃망울을 터뜨렸고, 오자마자 녹은 눈은 영롱한 구슬처럼 빛나는 물방울로 변해 한결 감동스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큰댁 한옥은 일제시대 때 증조부께서 건축하셨는데, 80년은 넘은 고옥이다. 그동안 큰댁 지붕 아래서 태어난 분들의 수가 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사형제 모두 그곳에서 태어났으니 우리 형제들에게는 고향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집이다.

큰 형님은 또 새로운 꿈을 꾸신다. 조카들이 결혼해 점점 가족들 수가 늘어나는 것에 대비해 행랑채를 헐고 게스트 하우스를 짓고 싶다는 의견을 내신다.

지금도 주말이나 명절 때만 사람이 북적일 뿐 평일에는 거의 비어있는 상황인데 굳이 큰 비용을 들여 게스트 하우스를 지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추진력 좋고 창의력 왕성하신 큰 형님이 어떻게 하실지 두고 볼 일이다.

올해 명절 때의 큰댁 모습은 어떨까. 감나무 있던 자리에 꽃을 피웠던 매화나무, 자두나무 있던 뒤란, 참새가 떼 지어 앉았다가 날아가는 감나무들, 늘 바람소리를 내는 대나무 숲, 제비집이 있던 처마, 기왓장 밑에 집을 지은 말벌 떼, 서쪽 하늘 아래서 말없이 고향을 지켜주는 두타산(頭陀山), 앞 가산(家山) 가는 길 도중에 있는 연당(蓮堂), 모두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그런데 모두 흐린 날의 쓸쓸한 모습들이다. 이 모습들이 환해지려면 무엇이 변해야하고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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