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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청진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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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1.0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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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은 풍물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다. 학교에서 배워온 소고나 장구·북을 두드리며 재롱을 피워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두건을 꼼꼼히 이마에 두른 뒤 전립을 쓰고 상모를 휙휙 돌릴 때면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때로는 손님이나 친척들 앞에서도 솜씨를 선보여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해주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목덜미가 아프다고 했다. 최근에는 자꾸 목을 만지거나 목을 가볍게 돌리는 습관도 생겼다. 아무래도 악기를 목과 어깨에 걸치거나 상모를 자주 돌리는 것과 연관이 있겠다 싶었다. 옆집 아이도 풍물을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좋아지겠지'했지만 좀처럼 낫질 않았다.

목을 치료해 줄 병원을 찾던 중 여기다 싶은 병원이 눈에 띄었다. 정형외과 전문병원이고 의사가 여럿인데 사진과 프로필을 보니 믿음이 갔다. 문의전화를 해보았다. 상담간호사가 증세를 들어보더니 적합한 의사를 추천해주고 시간예약을 해줬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지리릿 하는 진동음과 함께 예약관련 내용은 물론, 병원에 찾아가는 방법과 약도까지 날아왔다. '야! 나도 병원 운영하는 사람이지만 배울 점이 많은 병원이구나'하며 감탄했다.

규모가 큰 병원이었다. 시설·장비·직원들의 응대도 흠잡을 데 없었다. '제대로 찾아온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흡족했다. 진료 전에 간호사의 문진을 통해 엑스레이부터 찍게 했다.

대면진료 없이 검사부터 권해 조금은 의아했다. 촬영 후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와 아내는 아들의 증세와 그동안의 경과, 풍물동아리활동 등을 얘기하며 의사의 설명과 치료계획을 듣고자 했다.

"이건 사경으로 봐야합니다."
컴퓨터 화면을 한참 보다가 아들의 목을 요리저리 살펴보고 만져보더니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네에?"

사경(斜頸·torticollis)은 머리가 한쪽으로 기우는 질환이다. 대개 목과 가슴부위를 연결하는 근육인 흉쇄유돌근(sternocleidomastoid muscle)의 이상으로 인해 발생한다. 선천성 목근육의 이상이나 출산시 목 근처의 근육손상이 원인이 되며 안면의 비대칭이 올 수 있다.

상사근 마비같은 안근육의 문제에 의해 발생한 목기울임과 감별을 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사경이 별다른 기저질환 없이 건강하던 아이에게 발견되는 경우는 드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의 진단을 듣게 되어 놀란 우리에게 그는 이어 말했다.

"이건 오래 전부터 그랬을 것이고 이런 질환은 이 분야에 경험이 많은 대학교수에게 가봐야지 저는 이런 건 보지 않습니다."

힘들게 찾아온 병원인데다 진단에도 충분히 납득이 안돼 바로 나오기가 머뭇거려졌다.
"꼭 대학병원에 가야만 할까요? 저희는 여기서 치료해주기를 바라고 왔는데…."

"저는 이런 질환은 보지도 않고 경험도 별로 없어서 이런 병을 많이 보는 대학교수를 찾아가보시라구요."
그의 말투가 조금 거칠어졌다. 표정도 어두워졌다.

"저희같은 수술전문병원에서는 이런 질환, 특히 아이들은 잘 보지 않거든요. 근처의 수술전문병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가 이 말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했다. 아내도 나도 언짢은 마음을 안고 나왔다. 건물에 들어갈 때의 좋았던 이미지가 무너져 내렸다. '하긴 이렇게 번듯한 건물에 큰 병원을 만들어 운영하려면 수술을 많이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일을 하는 내가 그 마음을 이해 못할 리는 없다. 하지만 환자를 쫓아내다시피 하는 의사를 보며 섭섭함을 넘어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규모가 작긴 해도 나 역시 수술전문병원을 표방하며 개원했다. 개원 초기엔 물론 지금까지도 수술에 집착해왔다. 수술환자의 증감에 따라 기분과 표정이 바뀌던 날들이 많았고 지금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술환자에게는 더 정성을 기울이고 다른 환자에게는 성의없게 대한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를 찾아온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의 크기가 다를 수 없다. 어찌 수술환자라고 해서 중시하고 그렇지 않은 환자라고 해서 홀대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난 일들을 생각할수록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뜻해졌다.

10여 년 전 개원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서비스교육'이라는 걸 받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 그 강사의 강의는 여러모로 마음에 와 닿는 얘기가 많았다. 환자는 고객이며 고객의 만족이 서비스의 기본이라는 점, 친절한 응대와 인사, 쿠션화법 등의 대화법도 알려주었다. 강의 후 강사와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원장님은 개원하신 지 얼마 안됐는데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진료에 임하실지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녀가 직원들 앞에서 갑자기 물었다.
"아…. 네…. 성경에 보면 '여기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런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수일 전,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나온 말인데 그 순간 떠올랐던 것이다. 얼결에 이렇게 대답한 내게 서비스 강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말이네요. 원장님은 늘 그런 마음으로 환자를 대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이후로 나태해진 나,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 겸손을 잃어버린 나를 문득 발견할 때면 그 때의 일을 일부러 떠올려 자신을 다그쳐보곤 한다.

나와 내 아들은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한 의사를 만나 작은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서늘한 가슴을 안은 채 그곳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 모습을 돌이켜보고 뉘우치는 계기를 삼게 된 건 감사할 일이다. 오히려 내 가슴에는 따스한 불씨 하나가 지펴졌다.

이제부터라도 내게 오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작지 않은 마음을 기울여야겠다. 작은 자 하나의 큰 고귀함을 언제나 잊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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