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7월 대한의사협회 추무진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안산시 비뇨기과 원장 추모 및 현지조사 개선 촉구 결의대회'를 열고 복지부의 강압적 현지조사 개선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쳤다.ⓒ의협신문 김선경

건보공단의 현지조사 통보를 받은 개원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의료계는 강압적인 현지조사가 의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격앙된 분위기다.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9일 강원도 강릉시 소재 40대 A비뇨기과의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원장은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현지확인 대상에 포함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현지확인 사유는 사마귀 제거 비용을 이중청구했다는 이유로 알려졌다.

공단의 통보를 받은 A원장은 모 의사단체의 자문을 얻어 현지확인을 거부하고 보건복지부의 현지조사(실사)를 받겠다는 입장을 공단 측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비뇨기과의사회에 따르면 "이후 건보공단은 A원장에 두 차례에 걸쳐 자료제공을 요구했으며, 현지조사 거부 및 자료제출 거부에 따른 검찰 고발과 업무정지 1년 처벌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2일 밝혔다.

공단의 현지확인 통보 이후 A원장은 극심한 심적 부담감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원도의사회에 따르면, A원장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기도 했다. A원장의 서울에 거주하는 유족과 약 5~6년 전부터 떨어져 강릉에서 혼자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최근 수능시험을 치른 외아들이 있다.

의료계는 지난해 7월 안산 J비뇨기과의원장의 자살과 유사한 사건이 재발한 데 대해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건보공단의 현지확인 제도 폐지를 촉구했다.

대한의사협회는 2일 성명을 내어 "현지조사와 방문확인의 제반 문제에 대한 제도 개선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공단의 강압적인 방문확인과 자료제출 요구로 심각한 정신적 압박과 부담감에 짓눌려 하나뿐인 생명을 저버리는 비극이 초래된 이번 사건에 깊이 분노한다"고 밝혔다.

또 "지난해 안산 J원장에 이은 비보는 정부가 재정논리 틀 속에서 의료행위를 제한하고 규제하는 수많은 심사 및 급여기준을 만들고, 의사들의 일방적 희생만을 강요하는 억압적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비현실적이고 모호한 심사 및 급여기준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급여기준 설정의 틀을 포지티브(Positive) 방식으로 혁신하는 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건보공단 현지확인 제도 폐지하라"

진상 조사를 통한 책임자 처벌도 요구했다. 의협은 "공단의 방문확인부터 현지조사 의뢰까지 과정 전반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실시해 공개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경우 엄중 문책 등 조치를 취해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와 책임지는 모습을 다하라"고 요구했다.

또 건보공단의 방문확인을 즉각 폐지하고, 방문확인을 전면 금지하는 건강보험법 개정에 나설 것을 정부에 촉구하고 "고인의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급여기준 틀 혁신과 방문확인 폐지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추무진 의협회장이 지난해 7월 현지조사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산 J원장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의협신문 김선경

비뇨기과의사회도 2일 성명을 내어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한정된 조사목적도 없이 남용되는 건강보험공단의 무소불위의 조사권 앞에 피조사자인 의사들은 극도의 심적 압박감과 자괴감을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밝혔다.

의사회는 "A원장이 현지조사 확인서를 통보받은 시점은 안산 사건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보건복지부와 의협이 요양기관 현지조사개선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던 기간이었다"며 최근 보건복지부가 작년 12월 27일 현지조사지침 개선 방안을 발표하자마자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에 안타까워했다.

또 부당청구 가능성이 높다는 사유만으로 실시하는 보험공단의 현지조사권은 건강보험 심사 평가원 및 보건 복지부 실사와 중복되므로 현지 확인의 권한을 일원화하라고 요구했다.

이와 함께 현행 행정조사기본법은 피조사자 인권 보호를 위해 복수 기관의 중복조사를 금지하고 공동조사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건보공단 단독의 조사권 행사는 법률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현지 확인 제도는 요양기관이 청구·지급 받은 요양급여비의 적정 여부에 관해 확인이 필요할 때 건보공단이 요양기관을 방문해 사실관계 및 적법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이지만, 현실은 현지조사 대상을 선정하기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강압적이고 협박으로 점철되는 공단의 현지 확인제도는 폐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복지부가 발표한 현지조사지침 개선 방안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냈다. 의사회는 "건보공단의 5배수 환수 및 확정판결 전 임의 환수행위, 한 개의 행위에 대한 환수·업무정지·벌금·자격정지 4중 처벌, 부당한 조사를 거부한 경우 업무정지 1년 등 현지조사 지침 개정안에 있는 독소조항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요양기관이 포함된 행정처분 심의위원회 신설, 현지조사 대상 기관에 제한적 사전통지 시행, 사전심사 지침을 위반비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청렴 서약서 작성 등 현지조사 지침 개정안을 내놨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라며 "4중 처벌 제도에 대한 근본적 개선이 없는 상태에서 강압적 현지조사는 실제 현장에서 개선 효과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평소 조용한 성격...자살 믿어지지 않아"

고인의 대학 선배인 김남동 강원도의사회 대의원회 의장은 애통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김 의장은 "평소 조용하고, 자신의 처지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 성격이었다"며 "의대 동창회에 꼬박꼬박 나오고 비뇨기과의사회 모임에도 자주 참석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알고 지내던 후배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언제까지 이런 비극이 되풀이될지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