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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아름다운 이야기
청진기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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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0.2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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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원장(인천 부평·이주성비뇨기과의원)
▲ 이주성 원장(인천 부평·이주성비뇨기과의원)

그동안 많은 환자를 봤지만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환자가 있다.
오래전 일이다. 그날도 이번 여름처럼 몹시 무더운 오후였다.

진료를 마친 후 퇴근 준비를 하는 참이었는데 남루한 옷차림에 지친 모습을 한 중년의 여인이 왕진을 청했다. 이곳에 오기 전 몇 군데 병원에서 거절을 당했다고 말하는 여인의 눈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목소리도 애원에 가까워 나는 저녁 약속이 있었지만 여인을 따라갔다.

도시의 개업의로서, 특히 비뇨기과 의사로서 왕진은 흔한 일은 아니고 그런 적도 없었다. 몸이 아프면 가까운 병원에 방문하면 되고, 움직일 수 없으면 119를 부르면 되기 때문에 왕진이란 단어는 쓰지 않은 지 오래다.

옛날 영화에서 본 왕진 가방은 없었지만 환자 상태를 물어본 후 필요한 것을 가방에 챙겨 소설책에서만 읽었던 왕진을 나섰다.

택시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다 쓰러져 가는 집 앞에서 멈췄다. 아직도 내가 유년기를 보냈던 미아리 산동네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다는 데 놀랐다.

나는 먹지 못하고 고생한 옛날 기억을 잊고 살아왔다. 애써 잊어버리고자 한 건지도 모르겠다. 가난하게 산 것이 자랑도 아니었고 수치스러운 장면들이 떠오르는 것이 싫었다.

어렸을 때 나는 병원에 간 적이 없었다. 지금은 보험이 되어 부담 없이 방문하지만 먹을 것이 없던 시대에는 병원에 갈 돈으로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래서 치아가 아프면 그 당시 유명한 '치통수'로 통증을 참았다. 너무 아파 치과 의사가 아닌 치과에서 조수로 있던 돌팔이 의사에게 치료를 받은 적은 있다.

오랜만에 가난한 시절을 생각하며 좁은 골목을 걸었다.
도착하니 말기 암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했으나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퇴원한 중년의 남자가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두려움과 염려의 눈을 하고서 나를 맞았다. 소변을 보지 못해 요도 카테타를 한 상태로 퇴원했는데 그것이 막혀 소변을 보지 못한 탓에 방광이 차고 힘들어서 의사를 부른 것이었다.

카테터를 갈아 주었다. 암이 전신에 퍼져 있었고 욕창도 심했다. 살아 있었지만 환자의 남은 삶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깊은 애정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며 위로하고 있었다. 카테터가 막혀 힘들어할 때 이 병원 저 병원 정신없이 다니며 애원을 하다시피 왕진을 청한 것도 남편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성격이 맞지 않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이혼과 별거, 가출이나 정서적 이혼 상태가 한 집 건너 있는 요즘 세상에 그날처럼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려오는 감동이 있었다.

그냥 나오기가 아쉬워 같이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이는 세상은 잠깐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세상이 있는데 그곳에는 고통과 눈물이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을 할 때 환자와 아내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두려움과 절망의 표정이 사라진 듯 보였다(그 후 아내는 한사코 사양하는 나에게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 주었는데 어려운 형편에 적지 않은 돈이었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환자분은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었다. 이혼과 불륜, 미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옆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남자가 아닌가.

가난 속에서 말기 암으로 죽어 가는 남편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헌신하며 간호하는 아내.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것으로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저려 왔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고향의 나무와 개울, 바람과 별들이 지나갔다.

차는 산동네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섰고 거리는 다시 네온의 불빛과 사람들의 분주함으로 가득해졌다.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 들었고 방금 있었던 애절한 기억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지나갔다. 반세기 만에 찾았던 가난한 마음과 순수를 바로 잃어버렸다.

"그래. 나는 가난하지도 않고 몸도 건강해. 나는 그곳 사람이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네온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이 내 이기적인 모습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었는지, 다시 세상에 빠져들어 가는 내 연약함 때문이었는지, 이제는 사라진 고향의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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