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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의사의 '노동'
청진기 의사의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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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0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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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 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내가 회사에서 얼마나 힘든 줄 알아?"라는 남편의 불평에는 정형화된 정답이 정해져 있다.

전업 주부라면 "나는 집에서 노는 줄 알아?"일 것이고 맞벌이 부부라면 "누군 회사 안 다니나?"일 것이다.

현명한 부부간의 노동과 피로도에 대한 논쟁은 대개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치열하고 세심한 부부들은 2단계 끝장 토론으로 돌입한다. 이 때부터는 직무 기술과 하루 일과 보고가 꼭 등장한다.

직장인의 주장에는 이번 주까지 마감해야 할 일들, 마감하지 못한 밀린 일들, 상사와의 관계, 부하직원의 성과 부족 등이 열거되고 전업 주부의 논리에는 청소·빨래·설거지 기본 삼종세트와 시댁 친정 대소사, 아이들 학교 학원 뒤치닥거리, 공과금 납부와 분리수거까지 정량화 어려운 가사노동이 쭉쭉 나열된다.

여기까지 이르면 보통 서로의 전투력이 소진되고 그날의 스트레스도 어느 정도 잊혀지면서 부부는 다시 내일을 위한 휴전 모드로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부부는 3단계 고찰 모드를 시작한다.

회사에서 얼마나 힘든지, 집안일 하느라 얼마나 지치는지를 객관적으로 계산해 주는 도구나 이론이 없을까?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이 누구 없을까?

일찍이 1970년대 말에 카라섹교수는 업무에서 오는 피로의 강도를 두 가지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모델을 제시했다.

이 방법은 직장 내 업무를 요구강도와 재량권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평가해 보고 다시 이를 조합해 업무 스트레스를 산정하는 것이다.

요구강도는 단순히 내가 처리해야 할 업무의 양적 부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휴식 시간, 시간적 압박, 상사들의 상충되는 지시, 업무 속도, 집중도 등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같은 양의 업무라도 촉박한 시간 내에 마쳐야 하는 경우,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맞춰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에 업무강도는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재량권은 업무의 진행 전반에 관여해 다른 팀원이나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고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많을수록 높아 진다.

요구되는 업무강도가 과도하더라도 의사 결정 권한이 많은 직종이 있고 반면 요구되는 업무강도는 경미하더라도 재량권이 별로 없는 직종이 있듯이 업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계산할 때는 이 두 가지 영역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모델이다.

업무 요구강도와 재량권의 많고 적음에 따라 네 가지 조합이 나오게 되는데, 업무강도 낮고 재량권도 많은 조합은 저(低)피로군, 업무강도도 높고 의사 결정 권한도 없는 조합은 고(高)피로군으로 나뉜다.

의사의 노동은 어디에 속할까? 카라섹 교수는 의사 직업을 위 두 가지와 별도로 '의욕적 업무군'으로 분류했는데, 이 그룹의 노동은 업무강도는 높으나 의사 결정 권한도 높은 것이 특징이다. 업무의 요구강도는 높으나 의사 결정 권한이 높으므로 고피로군 보다는 스트레스가 덜하다고 본 것이다(이것은 물론 1970년대 미국의 이야기이다).

카라섹 교수의 분류에 우리나라의 의료 환경을 대입해 보자. 일정 수의 환자를 보지 못하면 원가보전이 되지 않는 저수가 구조는 당연히 업무의 요구강도를 높인다. 초박리다매 구조는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와 다름없다. 하루에 환자 몇 명을 진료해야 할지, 즉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는 본질적으로 의료수가에 반비례하게 된다.

재량권은 어떨까?

진료 내용 측면에서 검사와 처방의 재량권이 심평원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진료 시간 측면에서 보더라도 환자 편의를 위한 야간 진료, 주말 진료 등 시간의 재량권 역시 의사가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보험 청구를 틀리지 않게 하기 위해 업무가 늘어나고 고객에 대한 친절한 응대를 위해 표준절차가 복잡해 졌다.

고피로군의 직업을 불가피하게 유지하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첫 번째는 높은 소득이 보장되거나 일정 기간 후 크나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때, 두 번째는 배워 놓은 기술이 그 것 한 가지밖에 없을 때이다. 

다른 기술을 또 배워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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