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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19 15:07 (화)
詩詩한 시시포스
詩詩한 시시포스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6.07.2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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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김연종 원장
드디어 10년 만에 공식적인 작명을 마무리했다.

'詩詩한 시시포스'.

이른바 서울시 노원구의사회 시모임이 그것이다. 같은 지역에서 개원한 의사들이 매달 한차례씩 모여 시를 읽고 감상하며 자신의 느낌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자리인데 지금까지 변변한 이름도 없이 10년 이상을 줄기차게 모인 것이다. 나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고 우연한 기회에 소개받아 참석했다. 그 후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모임에 합류한지 벌써 4년째다.

매달 첫 번째 월요일, 가장 바쁜 시간임에도 참석률이 좋은 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진료를 마친 의사들이 우렁찬 빗소리를 뚫고 속속 모여든다. 각종 세미나·학술 집담회 등 많은 모임에 의사들의 참석률은 극히 저조한 데 유독 이 모임은 참석률이 좋다.

빗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꿈은 지나가는 한 순간의 빗줄기일 뿐이리라. 비가 점점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것 같다. 모른다는 것과 안다는 것, 이해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간다. 마치 빗방울이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저 빗방울의 어느 지점에서 비슷한 유전적 기질을 품은 '시시'한 분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 기운이 벌써 장마전선을 타고 내 몸을 감전 시킨다.

흐린 날/누군가의 영혼이/내 관절 속에 들어와 울고 있다
내게서 버림받은 모든 것들은/내게서 아픔으로 못박히나니
이 세상 그늘진 어디쯤에서/누군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저린 뼈로 저린 뼈로 울고 있는가/ 대숲 가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이외수 <장마전선> 전문

장마철 세차게 내리는 빗방울을 보며 조금 감상적인 기분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첫사랑의 달콤함에 대해, 이별의 고통에 대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료하고 심심한 장마철 감정으로 회귀하고 만다. 욱신거리는 뼈마디를 보며 일기예보를 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생각나 약간 청승맞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슈퍼컴퓨터가 예측한 날씨 속에 살고 있다. 분명 우리는 알파고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요즘 의료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원격진료로 옮겨간다.

원격진료가 정착되면 도서벽지 등 의료취약지에 거주하는 사람들 및 이동이 불편한 어르신·장애인 등의 취약 계층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원격의료는 '의료 수혜권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다가올 수 있다. 요즘 같은 장마철엔 유력한 진료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비윤리적인 의료행위를 제어할 수 없어 의료시장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과 지리적 접근성을 무시한 원격진료 시 일차의료기관의 기반이 무너져 대형병원 쏠림현상 가속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원격진료허용 법안이 의사와 환자의 필요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과거의 의료 행위가 관계지향형이었다면 미래의 의료 행위는 다분히 문제 해결형이 되기 십상이다. 제 증상을 입력하면 그에 따른 진단과 처방이 바로 출력되는 앱이 개발돼 머지않아 상용화 되리라는 전망이다. 직접 마주하지 않고도 진료할 뿐더러 멀리까지 전송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자신의 병변부위를 보여주지 않고 사진으로 찍어 오는 환자들이 많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들을 조합해 자신의 병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처방만을 원하는 경우도 있다. 의료행위는 이미 문제해결형으로 바뀌었다. 원격진료가 이를 더욱 부채질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다시 관계지향형으로 복원할 수는 없을까. 인문학이, 철학이, 문학이 그 해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원격진료를 논의하려는 우리의 대화는 다시 장마철 시로 옮겨왔다.

공작산 수타사로/물미나리나 보러 갈까/패랭이꽃 보러 갈까/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젖은 발 말리러 갈까/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 바치고/심심하면/그래도 심심하면/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긴 긴 장마

-김사인 <장마> 전문

수련의 시절, 유비무환을 외치곤 했다. 비가 오면 환자가 오지 않는다는 말로 의사들 사이에서 은어처럼 사용하는 말이다. 장맛비가 내리는 날, 학술 세미나를 뒤로 하고 시 모임에서 감상한 시들이 오히려 좌뇌를 꽉 채운 느낌이다. 모임에 참석했던 <시시한 시시포스> 회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더운 날씨와 지리한 장마로 몸이 찌뿌둥할 땐 마음 따뜻한 시 한편이 눅진한 마음을 달래는데 더 필요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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