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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먹어봐야 안다
청진기 먹어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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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7.0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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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 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성산대교 근처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올림픽대로와 노들길 두 가지 길 중 어느 쪽 길이 더 잘 뚫릴까? 항상 고민되는 질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교통 상황을 체크한다고 하지만 항상 변수가 있는 법, 이쪽 길을 선택해 달리고 있는 중에도 저쪽 길의 교통 사정이 궁금하다. 과연 내가 더 빠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 더 빠른 길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 두 사람이 동시에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은 노들길, 한 사람은 올림픽대로를 타고 시간을 재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실험맨이 동시에 출발하는 실험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실험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맞춰야 하는 조건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차종이 같아야 한다. 차종은 물론 배기량과 연식이 같아야 하고, 더욱 정확한 실험을 위해서는 현재까지의 주행거리와 연료통의 기름량, 오일 교환 시기 등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같아야 한다.

또한 두 실험맨의 운전 실력이 같아야 한다. 운전 경력, 무사고 여부, 보험사 벌점은 물론이고 가속 페달을 밟는 습관이나 추월 방법도 차이가 없어야 한다. 이 정도면 완벽할까?

그렇지 않다. 평소의 운전 실력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실험맨이 전날 과음을 했는지 최근에 허리를 삐끗해 운전 자세가 좀 흐트러졌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미세한 차이까지 고려한다면 가장 정확하게 진실을 알아 내는 방법은 동일한 차량, 동일한 실험맨이 양쪽 길을 달려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출발 시간이 다르면 물론 안 된다. 결국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동일한 사람이 같은 시간에 두 쪽의 길을 각각 가보는 것.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영화나 오락프로에서 이런 시도를 대신해 주었다. 중년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1990년대 인기 오락프로 <이휘재의 인생극장>에서 일찍이 이 개념을 정확하게 보여줬다.

선택의 기로가 되는 시점에서부터 각각 한쪽을 선택했을 때 예상되는 결과를 동일한 인물이 체험하게 해 결과를 보여주는 구성이었다.

그 보다 몇 년 후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주인공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하면 각각의 세상-현실세계와 매트릭스-을 경험하게 되어 있었다.

열쇠는 '동일인'이다. 두 사람의 실험맨이 각각 한 쪽 길을 달리는 것은 동일한 한 사람이 각각의 길을 달리는 것보다 오류 개입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이쪽 인생이든 저쪽 인생이든 동일한 사람이 겪어야 한다는 드라마의 원칙은 임상 시험에서 이쪽 치료이든 저쪽 치료이든 동일한 환자가 받아봐야 결과를 비교할 수 있다는 원칙과 일치한다.

임상 시험 설계자들은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수술 치료와 약물 치료를 비교하는 임상 시험에 참여하는 피험자는 수술 아니면 약물치료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임상 시험에서 양쪽 치료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확률과 무작위 배정의 마술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참여자들을 무작위로 나누어 이쪽 혹은 저쪽에 배정을 하면 확률 상 양쪽 군의 참여자 구성이 거의 똑같아 지게 된다. 똑같아지는 정도는 참여자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완전해 진다.

양쪽의 참여자 구성이 똑같다면, 이것은 동일한 사람이 각각의 테스트를 두 번 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볼 수 있게 된다.

시험군과 대조군 양쪽 그룹의 참여자가 구성이 똑같이 되어 서로 맞바꾸어도 결과에 아무런 변동이 없을 때를 참여자 교환성(exchangeability)이 있다고 말하고, 이렇게 참여자 교환성이 보장된 임상 시험일수록 신뢰도가 높아지게 된다.

이론은 대충 이러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개의 일들은 겪어 보지 않고는 예측할 수 없으므로, 아니 예측하기 싫으므로 사람들은 이쪽 저쪽의 결과를 따지지 않고 그냥 경험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멀리는 의약분업 결정이 그랬고, 가까이는 브렉시트(Brexit) 결정이 그랬다. 겪어보지 않고는 잘 알 수 없으므로 우선은 대세 같은 쪽을 따르는 것이 덜 불안할 뿐이다.

북한의 풍산개와 남한의 진돗개 중 어느 개가 더 낫냐는 말에 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먹어봐야 압니다."
겪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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