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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의료감정노동

청진기 의료감정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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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5.0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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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 주웅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정년 퇴임을 앞둔 은사 교수님 중 한 분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시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원체 미디어 노출을 꺼리시던 분이고 임상 진료와 수술·연구에 집중하시던 분이라 어떤 말씀을 하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자료 전달하러 잠시 들어갔다가 인터뷰에 귀를 쫑긋하게 됐다.

기자의 질문, "정년을 맞기까지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시면서 줄곧 갖고 계시던 개인적인 원칙이나 소신이 있으시면 말씀 해 주십시오."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진료 라든지 교과서적 치료와 같은 그럴듯한 대답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교수님 :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기자 : "그럼요 교수님!"
교수님, "그건, 음…방어진료입니다."

방어진료. 우리 나라 의사 중 이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최선의 진료, 빈틈없는 진료라고 의사들은 생각하는 이 단어를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2004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방어진료: <의학> 의료 사고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시행하는 치료나 진료.

신어 자료집의 단어 정의를 찬찬히 살펴 보면 '꼭 필요한지'에 대한 판단은 소비자나 법률가가 내린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따라서 신어 자료집의 정의를 가져다 요즘 유행하는 '한글 번역기'에 돌리면 '<의학> 의사들이 의료 사고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시행하는, 일반인이 보기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치료나 진료'로 번역될 것이다.

의료사고는 의사가 줄이고 검사가 필요한지는 일반인이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학문적·통계적 논쟁이 가능한 단계의 방어진료로 볼 수 있다.

진료실 안에서의 실제 방어진료는 더욱 빈틈없는 디테일과 끊임없는 긴장을 필요로 한다. 한 마디의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오게 되는데, 이런 '부메랑 깎는 사람'들은 초소형 녹음기를 갖고 진료실에 들어 오기도 한다.

몰래 녹음된 의사의 설명은 소송에서 당당히 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데,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이를 확인해 준다(그렇다고만 했지 결코 이를 장려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밀리에 녹음된 의사의 설명이 부메랑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 판결문은 보통 이렇다.

<피해자의 대표자인 공소외인이 피고인과 대화하면서 녹음한 이 사건 녹음파일 사본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 아니므로 타인의 대화비밀 침해금지를 규정한 통신비밀보호법 제 14조의 적용 대상이 아니고(대법원 2001.10.9. 선고 2001 도3016 판결 참조), 위 녹음파일 사본은 그 복사 과정에서 편집되는 등의 인위적인 개작 없이 원본의 내용 그대로 복사된 것으로… >

이런 비밀 녹음까지 예상하고 대화를 나눠야 진정한 방어진료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방어자의 체력 소모와 정신적 피폐가 너무 빨리 온다는 단점이 있다. 결국 지식노동자를 지향하던 의사는 감정노동자가 되고 만다.

감정노동자는 '직접 고객을 응대하면서 자신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서비스해야 하는 직업 종사자'로 정의되지만 우리나라 의사의 경우는 '직접 환자를 보면서 자신의 지식은 드러내지 않고 심평원 기준에 맞춰, 자신의 설명이 녹음된다고 가정하고 서비스해야 하는 직업 종사자'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의학적 지식과 경험을 억누른 채, 짧은 진료 시간과 보험 기준에 맞게 정형화된 행위를 해야 하는 의료감정노동은 감정적 부조화를 초래하며 적잖은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는데, 의사로서의 적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이 스트레스를 잘 관리할 수 있는가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 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외국의 사례가 궁금해져서 구글링을 해 보았다. '방어진료'를 영어로 뭐라고 부르는지 잘 몰랐기에 검색창에 창의적으로 단어 조합을 만들어 본다.

<self-defensive medical practice>
검색결과는 놀라웠다.

진료실에서 (의사가) 총기를 사용했을 때 자진해서 먼저 신고하도록 한다. 경찰이 오면 무기를 잘 보이는 곳에 던지고 바닥에 엎드려 손을 몸에서 멀리 떨어지게 한다.

이런 방어진료도 있다!
(법률자문: 정일채 변호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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