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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19 11:25 (화)
효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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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6.04.0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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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황건 교수
집을 떠나와 혼자 지낸 지 한 달이 넘었다.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고 꼬리곰탕이나 미역국을 끓이는데 숙달됐고 세탁기도 돌릴 수 있어서, 의식주는 어느 정도 불편 없이 지내게 됐다. 무료전화도 잘 터져서 멀리 있다고 느껴지지가 않는다.

다만 아내가 없어서 아쉬운 것은 등이 가려울 때 긁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팔이 길어 비교적 잘 긁을 수 있는데, 팔이 짧은 아내는 내가 없으니 얼마나 등이 가려울지. 전화로라도 장롱 깊숙이 넣어둔 효자손을 찾도록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 런던은 참고문헌을 찾을 때 정기간행물이면 대학도서관으로 접속하여 볼 수가 있고, 구독하지 않는 논문도 도서관끼리 연계해 찾아주니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소장하지 않은 단행본인 경우엔 찾기가 어렵다. 특히 국내에 없는 단행본은 아마존에서 주문해 구입하지만 거기에도 없는 경우에는 등이 가려운데 손은 닿지 않는 것만큼이나 갑갑하다.

어제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도 재고가 없는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

날씨가 궂어 바람이 불고 비는 떨어지는데 지하철을 갈아타고 해리포터의 촬영지로 유명한 킹스크로스역에 내려 대영도서관까지 걸어갔다. 이용자 등록을 하고 책을 찾아서 원하는 부분을 복사할 수 있었다.

나오면서 보니 도서관 앞 광장에 매우 큰 조각품이 사람의 키보다 더 큰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체격이 우람한, 안경을 쓴 남자가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굽혀 왼손으로는 컴파스를 들고 발 밑에서 무언가를 재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명판을 보니 스코틀랜드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파올로찌(Sir. Eduardo Paolozzi, 1924-2005)가 1995년 조각한 뉴턴(NEWTON)상이었다.

조각가인 에두아르도 파올로찌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을 조각으로 옮긴 뉴톤 조각상.
이 조각상은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가 그린 그림 '뉴턴'을 따라 조각한 것이라고 했다. 오는 길에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 들러 블레이크의 원작 그림을 보았다.

체격이 좋은 남자가 벌거벗은 채로 바위에 걸터앉아 바닥에 펼쳐진 천 위에 그려진 삼각형과 원을 컴파스로 재고 있었다. 뉴턴을 신성한 기하학자(Divine geometer)로 표현한 그림이었다. 그는 앉아 있었지만 몸을 앞으로 기울여 어깨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등을 굽히고 있었다. 옆에 누가 있었다면 그의 다리를 딛고 쉽게 그의 어깨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뉴턴(Issac Newton, 1642-1726)이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말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1676).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입니다(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나는 선배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힘입어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의학의 발전을 생각하며, 나무에서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 호기심을 갖고 관찰과 실험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에게 '컴파스'라는 '상징적인 물건'을 선사한 화가와 조각가의 창의적인 표현에 감탄했다.

미술관을 걸어 나오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훗날 나의 동료 성형외과의사들, 제자들과 자식들은 어떤 물건을 보면 내 생각을 한 번이나 해 줄 수 있을까?

쌀쌀한 데 있다가 실내에 들어오니 좀 덥고 등에 땀이 찼다. 팔을 뒤로 돌려 등을 긁어보았다. 옷 위로 긁으니 별로 시원하지도 않았다. 장롱 속 대나무 효자손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성형외과를 전공한 후에 수술에 필요한 사람 몸의 구조를 쉽게 알아보고자 노력해 왔으며, 가려운 데를 긁어주듯이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동료 성형외과 의사들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밝혀주는 데는 역부족이었고 이제 정년퇴임이 칠 년도 안 남았다. 이젠 저 조각상처럼 몸을 낮추고 엎드려서 연구할 때가 왔다.

훗날 그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줄 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효자손'을 떠올린다면 내 삶은 성공적이지 않을까?
 

*황건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현재 영국에 체류중이며, 5월말 귀국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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