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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입영열차
청진기 입영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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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3.0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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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원장(인천 부평·이주성비뇨기과의원)
▲ 이주성 원장(이주성비뇨기과의원)

1977년 2월 7일. 그 날도 새벽바람이 매서웠다.
내린 눈을 밟으며 입영열차를 타러 걸어 갔다.
법대를 중퇴하고 고시공부를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의대에 입학한 나는 군의관 신청을 할 수 있는 나이를 넘겨버렸다.

언제 영장이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재시를 밥 먹듯이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장이 나왔다.
"같이 갑시다."
"동생이 군대 가세요?"

집결지에 모이는 20대 초반의 눈에는 28살인 내가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은 모양이다.

입영열차는 논산을 향해 달렸다.
차안에서는 조교들이 군기를 잡으며 "18살 손들어" "19살 손들어" 소리쳤다.
대부분 손을 들었다. "20살, 21살, 22살…"
손을 드는 숫자가 점점 줄어들더니 26살부터는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이상"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나는 혼자 손을 들었다.
"어떻게 하시려고?…."
군기를 잡던 빨간 모자의 조교가 내 곁으로 오더니 걱정스런 눈으로 존대를 했다.
"몸조심 하십쇼."

그 후로 나이가 많은 것이 알려 지면서 훈련병 사이에서 '영감'이라고 불렸다. 지금은 그들도 60이 다 됐거나 넘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애들보다는 뒷골목에서 놀다 온 애들이나 농사를 짓다 입대한 아이들이 소위 의리라는 것이 있었다. 훈련 중 보이지 않게 나를 도와준 애들도 그들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전에 없었던 가족면회가 20년 만에 처음으로 실시됐다.
나는 집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안 계셨고 다 바쁘게 사는 형제들에게 연락을 하기 싫었고 무엇보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면회가 있던 날 나는 유일하게 혼자였다. 내무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같이 식사하자고 나를 부른 것도 뒷골목과 농촌출신 훈련병들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받고 떠나는 날 나의 주머니에 봉투를 넣어 주는 동료 훈련병이 있었다. 농촌에서 소를 키우며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훈련병이었다.

사회에서 알던 사람도 아니었고 훈련 중에 나하고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그리 적지 않은 돈이었다. 조금만 한눈팔아도 모자가 없어지고 신발이 없어지는 살벌한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조그마한 키에 농사를 해서인지 딱 벌어진 어깨를 한 정영덕이란 친구였다. 그 친구가 보기에도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 후에 그를 만난 적은 없다.

얼마 전에 전화가 온 적이 있다. "이주성 비뇨기과죠. 선생님이 논산에서 훈련받았던 분 맞죠?" 그렇다고 하니까 반갑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밝은 목소리였다. 정영덕이 아니면 나를 도와주었던 훈련병 중 한 명 이었을 것이다. 전화를 기다렸으나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나는 군대생활을 한 3년이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평안한 안식의 시간이었음을 말할 수 있다. 훈련과 노동과 점호와 얼차려 등 객관적으로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나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질서에 순응하니 누님 집에 붙어살며 하고 싶지 않는 의대공부를 하면서 등록금 때마다 고역을 치르는 것 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김장철에 밭에서 배추를 뽑아 군용차에 싣고 그 위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내가 배추인지 배추가 나인지 구별이 안 됐다. 그냥 트럭 위로 던져진 배추에 불과했다. '나'라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이 얼마나 힘들었냐고 묻고 있지만 만약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병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내가 힘들어 할 때는 나를 버리지 못하고 노후의 삶이나 자녀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을 때라는 것을 안다.

환자들 중에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많이 소유한 사람들 보다, 많이 소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자족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정영덕은 가난하게 살지만 지금도 불쌍한 이웃과 자신을 나누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제대 후 하기 싫은 복학을 하고 졸업과 결혼, 개원을 하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렇지만 군 트럭 김장배추 위에 누워있을 때의 자유를 느껴본 적은 없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며 욕망에 붙들려 살아온 느낌이다. 은퇴를 앞둔 요즘 나를 돌아보면 군대생활과 고시공부 한다고 화전민 촌에 있었던 8개월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환난 중에도 행복할 수 있다.

어려움 중에도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다. 헛된 희망, 욕망이 인간을 타락시키고 불행하게 만든다. 개원가에 찬바람이 분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후배 의사들, 특히 비뇨기과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내려놓을 때 행복할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2016년 2월 7일은 입대한지 4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고 결혼 35주년 되는 날이기도 하고 개원한 지 3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나를 버린 날이기도 하고 다시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의 소풍이 끝나면 또 다른 삶이 시작될 것이다. 남은 소풍이 아름답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나를 버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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