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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수학의 정석
청진기 수학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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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2.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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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 주웅 이화의대 교수

그 때 그 시절 소품으로 추억을 되살려 준 <응답하라 1988>. 첫사랑의 진한 그리움이 떠오르는 이는 가나 초콜릿이, 이문세의 노랫말에 한없이 공감했던 이는 마이마이 카세트가 반가웠을 것이다.

그런데 반가워 하는 사람보다는 지긋지긋해 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은 소품, 전교 1등 선우도 전교 998등 덕선이도 갖고 있었던 가장 보편적이 소품은 바로 '수학의 정석'이 아닐까 싶다.

80만 대입수험생이라면 누구나 한 권 쯤은 가지고 있었던 당대의 베스트셀러 수학의 정석.

일본판 정석의 한국어 번역본일 뿐이라는 설, 기본정석만 갖고는 서울대에 갈 수 없으니 실력정석을 꼭 풀어야 한다는 설, 정석에 빠진 내용은 해법수학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설 등등 수학의 정석을 둘러싼 설왕설래들이 많았는데, 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공대 갈 게 아니면 수학 공부 해봐야 실생활에 써먹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충고였다.

의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기에 그 주옥 같은 충고에 백 번이고 동의하고 싶었으나 이과 수험생 학력고사 점수 중 가장 많은 비중(75/320)을 차지하는 수학의 존엄을 훼손할 수 없어 깨알 같은 글씨로 된 유제와 연습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운 좋게 의사가 된다면 이 내용은 절대 쓸 일이 없을 것이라는 낙관을 한시도 잊지 않은 채로 탐독했던 수학의 정석.

그런데 '웬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살아 가면서 지켜 보니 수학의 정석에서 배운 원리가 여기저기 꽤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형회귀에는 직선의 기울기가 쓰이고 로지스틱 회귀에는 다시 자연 로그가 쓰인다.

융모막 종양의 종양표지자 추적에는 상용로그가 쓰이고 암세포 증식을 기술할 때는 지수가 쓰인다. CT나 MRI의 단층 영상을 보고 종양의 크기 모양을 상상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은 미적분에서 배운 구분구적법과 동일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어려운 것들만 쓰이는 것도 아니다.

덕선이를 비롯한 하위권 학생, 아니 수학의 정석 독자라면 누구든지 열심히 공부했던 제1장 <집합과 명제>는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내용이다.

<p이면 q이다> 조건 명제는 환자 설명에 빠지지 않는다.

"이 검사가 비정상이면 병이 있는 것입니다"라는 의사의 말에 "그럼 검사가 정상이면 병이 없는 것인가요?"라고 환자가 묻는다. 다시 이어지는 설명 "병이 없으면 검사는 정상으로 나오겠죠.

그렇지만 검사가 정상이라고 해서 병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풀어가는 설명 과정에는 명제가 참이면 대우명제만 참이라는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확률과 통계> 없이는 근거 중심 의학도 없다.

'신경통에는 고양이가 좋다'는 소문은 필시 누군가 고양이 고기를 먹고 신경통이 완화됐든지 완치됐든지 했다는 사례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의학적, 과학적 근거 정립은 이 사례가 우연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이고 이를 검증하는 과정이 임상시험이며, 임상시험의 설계와 수행의 근간은 확률과 통계가 된다.

임상시험에서는 통계 검증이 가능한 충분한 수의 사례들을 통해 치료 효과가 우연한 것이 아님을 보이는 경우에만 그 치료의 효과를 인정하게 되는데, 따라서 여기에도 수학의 정석이 이용된다고 볼 수 있다.

의대 졸업 후 수학 무용론을 방어하고자 여기저기 갖다 붙여 보았지만, 수학의 정석에서 병의원 경영의 실제에 가장 많이 쓰이는 장(章)은 <함수>라고 볼 수 있다.
y=f(x……).

병의원 운영함수는 보험수가·차등수가·심평원 삭감·인건비·임대료·이자부담·날씨·체감경기·전염병 등 온갖 내외부 요인들이 변수로 포함된 고차-다변수 함수인데, 이 변수들은 통상 소득 y값이 증가하려고 하면 미분계수를 마이너스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병의원 운영함수에 대해서 만큼은 수학의 정석으로도 풀 수 없다고 학력고사 수학 만점자 출신 의사들은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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