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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설날

청진기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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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2.0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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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원장(인천 부평·이주성비뇨기과의원)

▲ 이주성 원장(인천 부평·이주성비뇨기과의원)

어릴 적 설 전날에는 가난한 산동네 아이들도 가슴이 설레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밤새 한 벌밖에 없는 아이들의 옷과 양말의 구멍 난 곳에 천을 대고 기우고 깨끗하게 다림이질 한다. 새 옷이나 기차표 운동화를 사 오시는 날은 가슴이 터질 듯 만세를 부르고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

부모님은 없는 돈에 떡과 나물을 준비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줄 세뱃돈을 준비한다.

평소에는 굶는 날이 많았지만 설날만은 마음껏 먹을 수 있었는데 이즈음 어머니의 긴 머리가 갑자기 짧아지기도 하고 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사라지기도 한다. 어른들은 힘든 설날 이었지만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설 전날은 잠이 오지 않고 상상의 날개를 펴며 날을 샌다.

깨끗한 옷과 맛있는 음식과 세뱃돈! 그 때는 친구들과 함께 이웃 어른께 떼를 지어 세배를 다녔다. 어느 집에서나 우리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세뱃돈을 주었다.

저녁에는 또래들끼리 모여 누가 세뱃돈을 많이 받았는지 누가 많이 주었는지 셈을 한다.

이 돈으로 만화를 얼마큼 볼 수 있을지, 왕사탕을 몇 개를 사먹을 수 있는지 잘 도는 팽이를 살 수 있을 지 썰매를 만들 수 있는지 계산을 하며 가슴이 부푼다. 지금 생각하면 적은 돈이지만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세뱃돈이 주는 행복감은 한 참을 갔다. 돈이 떨어져갈 즈음 1년 후의 설날을 기다리며 잠이 든다.

그 때는 설날이라고 음식쓰레기가 남아 있지 않았으며 먹다 남은 것은 며칠 동안 다시 데워서 아껴 먹었다. 평소 못 먹던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고 탈이 나기 일쑤였다. 생선뼈나 약간의 남은 음식은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강아지 몫이었다. 하루만이라도 깨끗한 옷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요즘 설날은 공휴일일 뿐이고 아이들은 흥분하지 않는다. 밀린 숙제를 해야 하고 학원에서는 보충수업을 한다.

엄마는 새 옷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은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할 정도로 넘쳐난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지금까지 가꾼 몸매를 유지하려면 설 휴일동안 체중이 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기 싫은 시댁에도 가야하기 때문에 돌아오는 설이 반갑지만은 않다.

설 휴일동안 잔밥통은 늘 흘러넘치고 쓰레기도 넘친다.

세배는 자기 부모님이나 친척들에게만 하는데 그것도 학원과 시험을 핑계로 생략한다.
"4학년 아들은 바쁜가보네 같이 오지 못한걸 보니…."

"예. 밀린 숙제가 있어서…."
바쁘게 산 덕분에 반세기동안 많이 풍요로워져서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지 않아도 된다.

엄마는 아이들의 옷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대신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사다 준다. 때로는 카드를 쥐어 주고 스스로 사게 한다.

어릴 적에는 가난했지만 그리 분주하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 풍요로움은 엄마의 정성을 사라지게 했고,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아갔다. 풍요로움을 일구기 위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지만 여전히 목마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며 그 외로움을 도피하려 더 분주하게 움직인다. 

화려하게 보이는 세상 -더 선명해진 텔레비전, 더 화려해진 복장, 핸드백, 성형얼굴들…- 에 빠져 보이지 않는 순결하고 청결하고 거룩한 세상을 잊고 산다. 그러면서 더 고독해지고 이유 없이 스스로에게 분노한다.

남아도는 것들의 썩는 냄새가 난다. 우리의 마음도 가난하지 않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썩는 냄새가 난다.

몰려다니며 세배도 하고 썰매도 타고 팽이도 돌리고 눈깔사탕 하나로 행복해 하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우리들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원형극장의 검투사처럼 분주함과 빠름에 노예가 되어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싸움을 하는 슬픈 계절을 보내고 있다. 지옥이 따로 없다.

욕망과 승리와 시기와 질투만 있고 안식이 없는 곳이 지옥이 아니겠는가? 엄마의 가슴에 있을 시간에 어린이집으로 내몰리고 초등학교부터 밤늦게 학원에서 귀가하는 아이들.

이런 과정을 살았던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늘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가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정관수술을 받으러 왔다. 요즘 이런 청년들이 부쩍 늘었다. 자기 자녀들에게까지 이 험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울먹인다. 

가난 했지만 넉넉했던 산동네의 설이 그리워지고, 해처럼 맑은 인자했던 이웃 아저씨들이 그리워지고, 세배 다니던 동네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없어진 판자 집과 우물과 꽃밭과 솔밭과 실개천이 그리워진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정성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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