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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24-03-29 10:33 (금)
청진기 청진기 단상
청진기 청진기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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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1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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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미 원장(경기 고양·일산서울내과의원)
▲ 김금미 원장(경기 고양·일산서울내과의원)

"잠깐만요, 두꺼운 코트를 입고 들어오시면 진찰을 못해요. 정확한 진찰을 위하여 코트는 꼭 벗고 들어오세요."

추운 겨울, 몸을 꽁꽁 싸매고 진료실로 들어오시는 환자들께 외투만이라도 벗고 들어오시도록 간곡하게 진료실 문 앞에 문구를 써서 커다랗게 붙여놓았다. 환자를 좀 더 자세히 진찰해드리고 싶으니 무장해제를 하고 들어오시라는 마음이다.

길게 늘어뜨린 나의 도구, 청진기를 환자에게 대고 있으면 누구에게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마음의 문을 닫고 경계를 늦추지 않던 환자는 청진기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잠시 환자와 눈을 맞추고 깊은 숨을 들이쉬게 한다.

"들이쉬세요. 내쉬세요. 아주 잘하시네요."

이 한마디에 환자는 진심으로 열심히 숨을 쉬어준다. 숨소리에 환자의 아픔과 기쁨, 걱정과 열정이 들어있다. 깊은 들숨, 날숨과 함께 그의 근심과 우울함이 줄어든다.

문 앞에 붙여놓은 문구에도 꿋꿋하게 외투를 겹쳐 입은 구순(九旬)의 할머니가 진료실로 들어선다.
"원장님, 나를 진찰해 봐요. 내가 숨이 차서 걸을 수가 없어."

항상 혼자 다니시는 분이다. 자녀가 미국에 있어 자주 선물을 보내신다며 자랑하지만 외로움이 그녀의 깊은 주름에 고스란히 보이는 그 분은 항상 내게 자세한 청진기 진찰을 원하신다. 심장과 폐에서 들리는 지저분한 잡음이 그녀의 삶만큼이나 거친 파도처럼 전해온다.

"숨이 많이 차셨지요. 식사를 싱겁게 하시고 약을 드세요. 다음에는 검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나는 김 원장이 진찰해주면 벌써 다 나은 것 같아. 여기도 짚어 봐요."

진찰을 다 했으나 그녀의 말씀대로 청진기를 다시 한 번 들어올린다.

가슴의 소리를 듣는 도구인 청진기. 'Chest'를 뜻하는 'sthetho' 와 '보다'라는 뜻의 'scope'의 합성어인 'sthethoscope'. 청진기는 그리스 시대 히포크라테스가 자신의 귀를 환자의 몸에 대어 체내의 음을 직접 듣는 데서 비롯댔다.

그 후 1816년 라에넥이 처음으로 나무 막대에 구멍을 내어 외귀형으로 소리를 듣는 청진기를 발명한 이래 청진기는 의사의 진료를 폭넓게 상징하며 의사를 묘사하는 그림에 종종 함께 등장하기도 하고, 환자들에겐 가슴의 소리 뿐 아니라 마음을 읽어주는 표상으로, 의사들에겐 가장 요긴한 진찰 도구로 자리 잡게 됐다.

환자의 옷을 올려 입음판을 가슴에 대고 나의 무거운 책임감을 더하여 벨을 누른다. 입음판에 잡힌 음원이 먼 수련 과정처럼 길게 늘어뜨린 연결관을 지나 경쾌한 은색의 바이누랄를 통과해 내 귀로 다가온다. 환자의 고른 숨은 나를 마음을 안심시키고 불규칙한 숨소리는 나를 긴장시킨다.

청진기를 바라보며 나의 수련 시절 교수님을 생각한다. 요즘 젊은 의사들은 열심히 청진을 하지 않는다고 항상 타박하던 심장내과 교수님이다.

그 분은 항상 청진기를 어깨에 두르고 가슴을 펴고 걸으셨다. 염색을 하지 않은 흰 머리, 매서운 눈빛, 다부진 가슴에 청진기를 어깨에 두른 채로 흰 가운을 펄럭이며 병원을 평정하셨다. 교수님이 환자에게 청진기를 대면 환자들은 어린양이 되어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고, 열정적으로 진찰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진찰할 때 청진기가 없으면 난감하다. 15년 전인가. 나를 특별히 예뻐하셨던 외할아버지가 숨이 차다며 기별이 왔다.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 당진에 도착한 나는 청진기를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아, 명색이 의사 외손녀인데 병문안을 가면서 청진기도 안가지고 가다니! 나는 숨이 가뿐 외할아버지의 옷을 올리고 귀를 등에 대고 숨을 쉬시게 했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에서 더 가깝게 할아버지의 온기를 느꼈고 할아버지는 나의 사랑과 정성을 느끼셨으리라. 할아버지는 내가 달려가 진찰해드린 정성이 위로가 됐는지 그날 밤 고비를 넘기셨다.

청진기에는 의사의 환자에 대한 애증과 의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청진기는 환자와 나를 가장 가깝게 해주는 매개이자 그 연결관의 존재로 인해 환자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앞으로 1년간 <청진기 칼럼>에 나의 졸고를 싣게 됐다.

<의협신문>의 에세이 칼럼의 이름이 '청진기'인 것은 의사들 가슴의 소리를 듣고자함은 아닐까. 나의 소리를 청진기에 담아 독자들께 작은 울림으로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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