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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전공의와 내공
청진기 전공의와 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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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1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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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 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지난 해 세밑을 앞두고 전공의 특별법이 통과됐다.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이 법이 시행 되면 전공의의 근무시간은 주당 최대 80시간(교육 목적 8시간 추가 가능)으로 제한된다. 과중한 업무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던 전공의들의 처우가 다소나마 개선돼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전공의의 근무 시간에 대한 논의, 특별법 제정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암울했던 전공의 수련 기간이 떠오르곤 한다. 2016년 새해에 먼지 묻은 옛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선배들도 그렇게 지냈으니 요새 전공의 여러분들도 꾹참고 몇 년 버티라는 취지는 절대 아니다.

단지 예나 지금이나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전공의 '내부자들'끼리만 통하는 일종의 병원 내 토테미즘이 떠올라 몇 자 적어 본다.

전공의 근무는 이른바 루틴 일(routine job)과 당직업무로 나눌 수 있다. 루틴 일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전공의 근무 시간 산정, 전공의 업무 강도와 피로도에 주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당직업무이다.

루틴 일은 업무가 많고 힘들어도 발생과 종료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예기 불안이 적은 반면, 당직 업무는 밤새 찾아 올 환자 수나 중증도를 미리 가늠할 수 없기에 경험이 적고 멘탈이 약한 전공의는 상당한 심적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당직 업무의 불확실성과 야간 수면시간 확보를 위해 전공의들 사이에 구전되는 자생적 미신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내공(內功)이다.

내공이 강한 전공의는 당직인 날 밤에 아무런 응급환자도 오지 않고 내공이 약한 전공의는 당직날 밤에 병원 인근 건물에서 불이 나거나, 근처 국도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나거나 해 한 잠도 못 자게 된다, 하는 식으로 내공이론은 당직 업무 강도를 설명하는 데에 적용된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같은 연차 전공의의 당직 업무 강도가 극과극으로 다르고 이런 상황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병원에서 가장 젊고 가장 순수한 전공의들이라도 '내공에 따른 차이'라는 해석 말고는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내공이론을 처음 만든 선배전공의는 아마도 당직실에서 무협지를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당직 날 밤에 아무런 '콜'이 없이 당직실에서 무협지를 읽을 수 있었다면, 내공이론 창시자 자신부터 막강한 내공의 소유자임에 분명하다.

어떤 전공의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당직 다음날 아침 지난밤의 환자 상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밤새 환자가 많아 수면이 부족한 전공의는 체력적, 심리적으로 지쳐가면서 내공을 회복할 길이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전공의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또 당직이 거듭되면서 내공이 강한 전공의의 업무까지도 자신에게 몰리게 되는 현상도 겪게 된다. 이를 테면 환자가 (내공 강한 전공의 당직인)어제 응급실에 오려고 했는데, 집에 있는 약을 먹고 증상이 좋아져서 하루 참다가 (내공 약한 전공의 당직인)오늘 자세한 검사를 받아 보려고 왔다, 하는 식이다.

이쯤 되면 내공이론을 한낱 미신이라고 치부하려던 젊은 의사들도 더 이상 내공이론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청춘 전공의들 사이에 내공 쌓는 법, 내공 지키는 법이 퍼져 나가게 되는데 그 비법들은, 알고 보면 의학이나 전공 술기는 아니지만 전공의로서의 품위와 자긍심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예컨데 "오늘은 왜 이렇게 응급실이 한산하지?"와 같은, 동료애가 없는 언사를 무의식적으로라도 하면 내공이 샌다[누(漏)]는 설이나 "나는 원래 환자를 안 타!" 처럼 교만하고 겸손하지 못한 자세를 견지하면 즉각 환자가 몰려온다는 설 등은 내공 관리를 통해 부지불식간 전공의 인격 수련이 같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내공이 강한 전공의라고 해서 스스로의 내적 수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또한 전해진다. 자신의 내공만 믿고 '야마'를 따르지 않는다든지 병원 내 선량한 양속들을 따르지 않는다든지 해 독선적으로 행동하면 언제든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질 수 있다는, 원내에 대대로 전해오는 경고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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