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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의사 지바고

청진기 의사 지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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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1.0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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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원장(인천 부평·이주성비뇨기과의원)

▲ 이주성 원장(인천 부평·이주성비뇨기과의원)

영화 <닥터 지바고>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단체 관람으로 대한극장에서 본 것 같다.

일 년에 두어 번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영화 관람을 했는데 점심 먹고 노는 기분으로 영화구경을 했다. 볼거리가 별로 없고 가난했던 시절 영화는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며 힘든 삶을 위로해 주었다.

그날도 오후에 논다는 기분으로 친구들과 떠들면서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나는 영화에 빠져 들어갔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서정의 아름다움은 감성이 강한 사춘기의 나를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자연은 나에게 열병을 앓게 했으며 그 강호(江湖)에 대한 깊은 시름은 아직도 남아 있다. 특히 지바고가 '바리키노'에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감자를 캐는 장면과 시를 쓰는 장면은, 나에게 의사와 농부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산 속이나 강가에서 보낸 시간들이 많아졌다. '가나안 농군학교'도 여러 번 답사하며 돌아가신 김용기 선생님과 그 가족들도 만나보았다. 비 오는 날이면 그 천국 같은 농장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바라봤다.

경기도 황산에 있는 만평의 농원에는 감자·고구마·토마토·가지와 포도나무·사과나무 등이 심겨져 있었다. 비를 맞은 농장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무렵 영국의 낭만파 시인인 키츠·워즈워드·예이츠와 신석정·김영랑 시인처럼 자연을 노래한 시들에 빠지기도 했다.

그 후 40 여년의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긴 방황 끝에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결혼,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됐다. 숨 가쁜 현실 속에 남편과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자연에 대한 동경과 열병은 나의 무의식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가끔씩 꿈틀대고 있을 뿐이다.

깊은 산속을 걷거나 아름다운 강가에 앉아 있으면 문득문득 고등학교 때의 자연에 대한 격정이 스쳐 지나가지만 병원에 출근하며 일상으로 돌아오면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 감정은 정지되고 응고되고 만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나이 들어 다시 본 영화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서정의 아름다움과 자연에 대한 열병을 앓던 고등학교 시절만큼 가슴 설레지는 않았다.

반면에 한 개인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의사 지바고는 볼세비키 혁명을 맞이해서도 자신의 영적 독립성을 지켜나가며 진리를 탐구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1917년 혁명은 그의 운명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고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혼란과 경제적 궁핍과 사유재산의 몰수, 체포와 이별, 병들고 죽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떤 운명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끌려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 의지가 무시되고 꿈이 상실되는 현실의 고뇌가 느껴진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면 커다란, 거역하지 못할 삶의 굴레가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온 느낌이다. 내가 선택한 것보다 선택된 것들이 더 많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태어남, 부모님, 늙어감, 죽음, 시대, 계절의 흐름 등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전쟁이나 정치 상황, 지진, 경제적 어려움 등 주위의 사건 사건들이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벌어지고 그것이 나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음을 보며 나는 무력감에 젖어든다.

나의 인생의 종점에 <닥터 지바고>를 다시 보게 되면 또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자연에 대한 그리움일까? 혹은 운명에 대한 무력감일까?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죽음과 죽음 뒤의 한 인간의 영향력에 대한 단상일까?
아마도 운명을 응시하며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워야겠다는 나만의 영감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지나온 시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나에게 남아 있다. 그 시간들을 내 무의식 속에 울고 있는 슬픈 염원들을 위로해 주고 더불어 해방시켜 주는 시간으로 채워주고 싶다. 내안에 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듣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눈을 감는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는 고요한 밤이다. 가로등 불빛 속에 내리는 눈은 바람 따라 이리 저리 흩날리는데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설경이 영상으로 지나간다.

오늘 밤은 바리키노에서 감자를 캐는 지바고를 만나는 꿈을 꿀 것 같다. 깊은 산속 호숫가 초가집, 난로 옆에서 시를 쓰며 행복에 겨워 미소짓는 나를 만날 것도 같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슬픈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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