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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꿈꾸는 내비게이션

청진기 꿈꾸는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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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2.0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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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 김연종 원장(경기 의정부·김연종내과의원)

"요즘 무슨 꿈을 꾸고 계시나요?"

지난 주 송년 모임에서 선배 의사가 불쑥 던진 질문이다. 요즘처럼 힘든 시기엔 꿈마저 사라져버렸다는 자조적인 의미였을 테지만 사람들은 최근에 꾼 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가위 눌린 꿈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 군대에 다시 끌려갔다는 꿈 이야기를 하자 누군가는 다시 전공의 수련을 받는 끔찍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았던 어렸을 적 꿈 이야기도 등장했다.

나도 얼마 전에 꾸었던 꿈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단절된 기억의 조각들을 짜 맞추니 꽤 선명한 모습으로 재생됐다. 나는 길 위에 있었다.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안내를 시작합니다." 스마트폰 앱의 상냥한 목소리가 나를 이끈다. 나는 어느새 화면 속 가상공간을 따라간다. 한참 운전하다보니 처음 보는 곳이다. 신호등 앞에 정지하고 주위를 유심히 살핀다. 여기가 어디일까. 창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낯선 거리와 생경한 간판들, 무뚝뚝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어디서 본 것 같지만 전혀 알 수 없는 풍경들. 분명 사이버 공간 깊숙이 빠져든 게 틀림없다. 기시감은 어느새 불안감으로 바뀌어 나를 엄습한다. 어떻게든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현실과 가상공간을 헤매는 사이 신호등이 바뀐다. 다시 안내가 시작되고 한참 길을 달려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조급한 마음으로 가속페달을 세게 밟는다. 바깥바람이 거세지며 과속 경고음이 울린다. 이미 가속도가 붙은 차체가 심하게 요동친다. 때론 사랑도 요동치고 인생도 구부러지리라.

열정만 품고 달려 왔던 숨 가빴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세모의 분주함에 젖어 있는 주변 풍경을 살피다가 기어이 내비게이션 화면을 놓치고 만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젊은 그녀는 툴툴거리고 조급한 중년은 여전히 계절을 추월하는 중이다.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비게이션을 끈다. 처음 출발하는 기분으로 다시 시동을 켠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표지판이 뒤엉키고 순하던 길들이 마구 날뛰기 시작한다. 곳곳에 과속방지턱이 널려있고 진입금지 팻말들이 가로막고 있어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 삶도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삶의 고비를 예측하고 경고음에 따라 운전하면 험난한 길은 피할 수 있겠지. 내비게이션이 정해준 길을 따라 핸들을 돌리다 보면 별다른 고통 없이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고통 없이 사는 기계적인 일상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다. 더는 바랄 게 없는 세상이 된다한들 분명 또 다른 욕망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일방통행인 삶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첫 만남이 그렇고 첫 운전이 그렇듯, 미답의 길을 찾아 가는 흥분 섞인 설렘을 놓치고 싶지 않다.

운명처럼 다가온 시간을 벗 삼아 느긋하게 달리고 싶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지 못한 작은 도로나 아직 등재되지 않는 새로운 길을. 그런데 내가 꿈꾸었던 그곳은 어디일까.

내가 경로를 이탈해 또 다른 꿈을 좇는 동안에도 동료들의 대화는 지속됐다. 딸의 남자 친구를 만나는 날이면 아직도 키가 더 자라는 꿈을 꾸게 된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의 사랑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욕망의 표현이리라.

비록 왜곡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꿈이야말로 소망 충족이요, 무의식에 이르는 통로가 아니던가. 돌이켜보면 인간은 늘 꿈을 꾸고 산다. 천지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멈추지 않듯이. 하지만 언제부턴가 꿈을 잃고 살아간다. 이제는 꿈속에서도 내비게이션이 길을 안내한다.

나 역시 어렸을 적 꿈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의사가 되고나서도 무슨 꿈을 꾸며 살고 있는지 가물거린다. 정말 숨 가쁘게 살아왔고 매번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을 뿐이다. 이성과 감성의 장벽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시간들도 모두 꿈이었을까. 잃어버린 꿈을 찾아 스마트폰 앱을 검색한다.

넌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사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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